義兵抗爭史

■ 36. 聯合義兵의 서울 進攻作戰

동천 2020. 4. 27. 17:14

 

 

 

 

 

 

 

 

 

義兵抗爭史


36. 聯合義兵의 서울 進攻作戰


항일 의병 투쟁이
새로운 기세로
고조되는 가운데
의병장들에게
부과된 새로운
현실적 과제는
압도적인 왜군과
싸우기 위해서는
연합전선의
결성이었다.

국권회복을
궁극적 목표로
투쟁하고 있는
의병들로서는
서울 탈환의 꿈은
가슴에 사라지지
않는 하나의
커다란 이상이었다.

하여, [이인영] 의병장은 지방에서 제 아무리 日軍과 싸운다 해도
日軍이 서울을 장악하고 있는 한 국권회복은 불가능하다고 판단,
전국의 산발적인 의병진을 대규모 연합의병부대로 편성하여
통일된
지휘 아래 서울로 진격하여 일거에 일군을 패퇴시키려는 계획을 수립하였다.

1907년 11월 각 의병대장에게 경기도 양주로 집결할 것을 촉구하였고
이어 ‘13도 창의 대진 소원 수부’를 설치하고 의병장들의 만장일치로 총대장이 되었다.
흩어진 조직을 재정비하여
관동군 6천여 명과
진동 군 2천여 명을 중심으로
연합부대를 편성하였는데 그 진용은 다음과 같다.

표# 연합의병 진용

총대장

군사장

강원

의병장

충청

의병장

전라

의병장

영남

의병장

황해

의병장

평안

의병장

함경

의병장

李麟榮

許蔿

閔肯鎬

李康秊년

文泰洙

朴正斌빈

權義熙

方仁寬

鄭鳳俊


서울 진격일을 12월 말로 정한 선생은 예하 각 의병대장들에게 경기 양주군 수택리 일대에
진주하도록 令을 내리고 각 의병진에서 결사대원 3백여 명을 선발하였다.

[李麟榮] 총의병대장은 공격개시에 앞서 심복부하인 [김세영]에게
"을사조약의 폐지와 13도 [창의대진소]를 교전단체로 인정해 줄 것"을
요구하는 내용의 격문원고를 작성, 서울 주재 각국 영사관에 전달하게 한 뒤
2천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동대문 밖 30리 지점까지 진격하였다.

한편, 왜군은 의병의 정보를 입수하고 수천 명의 보병과 기마병으로
망우리 일대 군사요충지를 선점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결사대원이 앞장서 연발총무기로 무장하고 필사의 일념으로 전투에 임했지만
각도 의병진들이 기일 내에 도착하지 않아 고립무원의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李麟榮]의병총대장은 눈물을 머금고 망우리고개를 넘지 못한 의병대에 후퇴명령을 내렸고,
패전의 진용을 재정비할 무렵인 1908년 1월 28일, 부친의 사망소식을 접하게 된다.

부친의 병이 위중함을 알면서도 의병총대장직을 수행하느라 임종을 지켜드리지 못하여
자식 도리를 다하지 못한 일 등을 통곡하며 자책한 후 [허위] 군사장에게 총대장직을 위임하고
3년상이 끝나면 다시 합세하겠다는 뜻을 알리고는 그날로 문경 고향집으로 달려갔다고 한다

후임 의병총대장 [허위]는 소요산까지 퇴군하게 되었는데
왜군의 소요산에 대한 火攻作戰으로 1908년 5월 14일 포천 영평에서 체포되었다.
이로써 의병 15년사의 대미를 장식하려던 서울 공략의 계획은 무산돼 버리고 만다.

[李麟榮]의병총대장은 이후 [時榮]으로 이름을 바꾸고 한때는 경북 상주에서 노모를
모시고 살다가 부친의 묘를 성묘하는 것이 단서가 돼 1909년 6월 7일
충북 황간 금계동에서 일군 헌병에게 체포되었고.
1909년 8월 13일 경성지방재판소에서 내란죄를 적용하여 교수형을 받게 되었다.

參考文軒: 壬辰倭亂史.義兵運動史.2作戰司精神敎育敎材 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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