義兵抗爭史 항일 의병 투쟁이 표# 연합의병 진용
서울 진격일을 12월 말로 정한 선생은 예하 각 의병대장들에게 경기 양주군 수택리 일대에 진주하도록 令을 내리고 각 의병진에서 결사대원 3백여 명을 선발하였다. [李麟榮] 총의병대장은 공격개시에 앞서 심복부하인 [김세영]에게 "을사조약의 폐지와 13도 [창의대진소]를 교전단체로 인정해 줄 것"을 요구하는 내용의 격문원고를 작성, 서울 주재 각국 영사관에 전달하게 한 뒤 2천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동대문 밖 30리 지점까지 진격하였다. 한편, 왜군은 의병의 정보를 입수하고 수천 명의 보병과 기마병으로 망우리 일대 군사요충지를 선점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결사대원이 앞장서 연발총무기로 무장하고 필사의 일념으로 전투에 임했지만 각도 의병진들이 기일 내에 도착하지 않아 고립무원의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李麟榮]의병총대장은 눈물을 머금고 망우리고개를 넘지 못한 의병대에 후퇴명령을 내렸고, 패전의 진용을 재정비할 무렵인 1908년 1월 28일, 부친의 사망소식을 접하게 된다. 부친의 병이 위중함을 알면서도 의병총대장직을 수행하느라 임종을 지켜드리지 못하여 자식 도리를 다하지 못한 일 등을 통곡하며 자책한 후 [허위] 군사장에게 총대장직을 위임하고 3년상이 끝나면 다시 합세하겠다는 뜻을 알리고는 그날로 문경 고향집으로 달려갔다고 한다 후임 의병총대장 [허위]는 소요산까지 퇴군하게 되었는데 왜군의 소요산에 대한 火攻作戰으로 1908년 5월 14일 포천 영평에서 체포되었다. 이로써 의병 15년사의 대미를 장식하려던 서울 공략의 계획은 무산돼 버리고 만다. [李麟榮]의병총대장은 이후 [時榮]으로 이름을 바꾸고 한때는 경북 상주에서 노모를 모시고 살다가 부친의 묘를 성묘하는 것이 단서가 돼 1909년 6월 7일 충북 황간 금계동에서 일군 헌병에게 체포되었고. 1909년 8월 13일 경성지방재판소에서 내란죄를 적용하여 교수형을 받게 되었다. 參考文軒: 壬辰倭亂史.義兵運動史.2作戰司精神敎育敎材 等 東 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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