義兵抗爭史

■ 52. 韓國戰爭과 學徒義勇軍

동천 2020. 5. 8. 15:56

 

 

 

*48. 靑山里 戰鬪 背景 : 생략
*49. [金佐鎭]의 靑山里 戰鬪 : 생략
*50. 光復軍 創設 : 생략
*51. 光復軍 活動 ; 생략

 

 

 

 

 

義兵抗爭史


■ 52. 韓國戰爭과 學徒義勇軍 



1950년 6월 26일 11:00시경 각급학교는 등교한 학생들을 연병장에 집합시켜
북괴 남침을 알리고 교령을 발표하자 서울 시내 각 중학교부터 대학 교정에서는
북괴 남침을 규탄하고 괴뢰 도당을 타도하자는 궐기대회가 열렸고
마침내 학도결사대원으로 지원하고 나서게 된다.


하여,
풍전등화 같았던
조국을 구하기 위해
서슴없이 전쟁터에
뛰어들었던 학도의용군,
그들의 나이는 15세에서
20대 초반까지의
학생 신분의
어린 청년들이
교복과 교모를
그대로 착용한 채
총을 들었다.

그들은  개별적으로
수십 명씩 부대를 찾아와
싸우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그렇게 모인 학도의용군은 2만 5천 명에서 3만 명.
학생 대표들은 국방부 정훈 국장 [李瑄根] 대령을 방문하여
학생대표:저희들은 입대 지원하려고 왔습니다. 저희들에게 총을 주십시오!


정훈 국장:그건 안돼. 군인은 나라를 지키고 학생은 학교를 지키시오!


학생대표:지금 조국은 위험한 시련을 겪고 있지 않습니까?
국가가 존재해야 학교도 있지 않습니까?

정훈 국장:국가가 여러분을 요구할 때 봉사할 기회가 있을 것이오.

1950년 6월 27일, 결국 서울대학교 문리대 학생들은 [학도 위문대]라는 이름으로
구국 봉사대를 조직, 정훈국에서 마련해 준 트럭에 분승, 의정부를 향해 떠났다.
가는 도중 학생들은 창동에서 진지 국군을 도왔고,
인근 마을에서 군인들을 위해 마련한 음식을 운송하고,
후방에서 온 탄약상자를 운반하는 등 군을 도왔으며,
이것이 학도 위문대로서 최초의 활동이었고 서울에서 최후의 것이었다.


[1 ]非常學徒隊

1950년 6월 28일, 수도 서울이 적의 수중에 들어가자 피난길에 나섰던
서울 시내 각급 학교 호국단 간부 200여명이 수원에 모여 [非常學徒隊]를 조직하여
6월 29일부터 국방부 정훈국 지도하에 처음으로 종군하게 된다.

이것이 학도로서 조직적으로 참전케 된 최초의 학도의용군으로서
그 사실이 전국 방방곡곡에 알려져 의분에 찬 애국 학도들 가슴에 얼을 불러 일으켰고
마침내 100만 학도의 궐기를 촉구하는 嚆矢가 되었다.

[2]大韓學徒義勇隊

7월 1일 대전에서 많은 피난 학도들과 현지 학도들이 모여 대한학도의용대를 스스로 조직,
그중 상당수가 현지 입대하여 일개 병사로써 참전했다.

7월 17일 국방부가 대구로 이동해감에 따라 [학도의용대]도 대구로 이동하여
7월 19일, [학도 위문대] 학생들은 대구에서[비상학도대]와 [의용학도대]를 통합,
             [대한학도의용대]로 개편하였고,
             부산에서도 이와는 별도로 [대한학도의용대]가 조직되어 참전하게 된다.

정부가 부산으로 遷都하자 두개의 학도의용대는 하나로 통합되어
국방부 정훈국에 소속되어 유일한 전시 학도 조직체로서
[학도의용군]의 실질적인 모체가 되었고.

[학도의용대]를 통해 전투에 참가한 대원수가 2만7천7백명에 이르렀으며,
20만의 대원을 보유하여 후방 선무공작 등 보국에 공헌해었다.

參考文軒: 壬辰倭亂史.義兵運動史. 2作戰司精神敎育敎材 等

東 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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