二桃殺三士
2개의 복숭아로 3 장수를 죽인다. 권모술수의 진수를 보여주는 듯한 이 말의 뿌리를 찾으려면, 2,530 餘年으로 거슬러 올라 가야한다.
"안영"은 齊나라 景公(B.C. 547-490년) 때 宰相을 지낸 사람으로
孔子도 " 안영이 타고 다니는 수레를 한번 몰아 봤으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 " 할 정도로 우러러 보는 사람으로
그는 齊景公을 補佐하여 初代 覇公이었던 齊桓公의 榮光을 齊나라에 되살린 名宰相으로 알려져 있는 사람이다.
당시의 周邊國 情勢는 晉나라 와 燕나라의 聯合軍이 침공하여 크게 敗한 데다 인접 楚나라는 영걸 楚平王이 재위에 올라 覇者國으로서의 발판을 굳히며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어 齊景公은 큰 근심에 쌓여 있었다.
이 무렵, 齊나라는 景公이 즉위한 후, 안영의 활약으로 內政을 완전히 다지고 軍事力 增强에 온 힘을 쏟아붓고 있는 때 였다.
그는 당시 齊나라를 외적의 침입으로 부터 지키기 위한 대장감으로 일찍 부터 "사마양저"라는 사람을 마음속에 두고 있었으나
시골출신의 사마양저에게 兵權을 맡긴다는 것은 조그만 功積으로 齊景公의 寵愛를 받고 있는 眼下無人의 고야자, 공손첩, 전개강 이라는 세將士가 걸림돌이 될 것으로 생각했다.
그기에다 齊경공은 옛날 齊桓公 처럼 놀기를 좋아하여 政事는 안영에게 맡기고 자신은 술과음악, 사냥으로 소일 했는데 이러한 齊景公의 비위를 잘 맞추는 寵臣 양구거(梁丘據)라는 大夫가 있었고.
또 한사람 진무우(陳無宇)라는 寵臣이 있었는데 그는 틈만나면 私財를 뿌려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 했기 때문에 齊나라에서 인기가 높았다.
이 3傑들과 진무우, 양구거의 어울림은 社稷을 最優先視 하는 政治觀을 가진 안영으로서는 不安하게 생각하여 먼저 이 3傑부터 除去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러고 있던차에 마침 인접 魯나라에서 "노소공"과 "숙손착"이 親善訪問하여 연회를 베풀게 되었는데, 안영은 이 연회에서 3걸을 제거하는 기회로 삼았다.
두 임금이 얼큰히 취하였을 무렵 안영이 아뢰었다.
후원에 심어놓은 金桃가 익었을 시절입니다. 두 君主께선 金桃를 맛보시고 上壽하십시오.
그렇게 말하고는 안영은 직접 후원으로 가서 6개의 金桃를 따 와 두 임금께 바치고 하나는 노나라 숙손착에게 맛 보도록 권하니
숙손착은 臣이 어찌 제나라 재상 안영에 萬分之一 이라도 따를 수 있겠느냐며 사양하고 안영에게 먹기를 권한다.
그러자, 齊景公은 그를 것 없이 두 사람이 하나씩 맛 보면 되질 않겠소? 라고 말 하면서 복숭아를 안영과 숙손착에게 하나씩 내려주니 받아 먹고 감사의 절을 올렸다.
이제 쟁반에는 2개의 복숭아가 남아 있다. 天下第一이라 여겨지는 武士에게 金桃를 내리시어 그 勇盟을 널리 알리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라고 안영이 말했다.
齊景公은 좋은 생각이라며 안영에게 지시 했다. 뜰 아래 있는 臣下들로 하여금 자신의 공적을 아뢰게 하되 宰相께서 輕.重을 가늠하여 복숭아를 내리도록 하오.
齊景公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3傑 中 제일 먼저 공손접이 한발 앞으로 나서며 " 저는 主公께서 사냥 길에 나섰을 때 호랑이가 나타나 위험에 쳐하였시 이를 맨주먹으로 때려잡아 主公을 위험에서 구하였오."라고 하자 안영은 2개 남은 복숭아중 하나를 그에게 주어 먹게 했다.
그러자 전개강이 나서며 " 저는 서나라 와의 싸움에서 적군 500명을 사로잡아 서나라를 굴복시킴으로써 기름진 땅을 차지하게 하였다."고 하자 안영은 마지막 남은 하나의 복숭아를 그에게 주어 먹게 하였다.
일이 그렇게 되어 3傑중 한사람 고야자, 그는 主公이 黃河를 반쯤 건널 즈음 큰 자라가 나타나 主公이 탄 말을 물고 강물 깊은 곳으로 끌고 들어 가자 고야자는 큰 자라와 사투를 벌여 主公이 아끼던 말을 구한 盟將 인데도 복숭아를 먹지 못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어쩌랴! 그에게 내려 줄 복숭아가 없는 것을... 그리하여 齊景公은 고야자에게 고야자는 내년을 기약하라.고 命하게 된다.
일이 이렇게 되고 보니
공손접은 복숭아를 차지 하려는 탐욕때문에 두 임금과 신하가 보는 앞에서 고야자를 모욕 주었으니 자신은 죽어 마땅하다 면서 그 자리에서 칼을 뽑아 자결하고 만다.
그러자 전개강은 자신은 보잘 것 없는 공로로 복숭아를 받아 먹었는데 天下 第一 가는 고야자는 먹지 못했으니 죽어 마땅 하다면서 또 그 자리에서 칼을 뽑아 자기의 목을 찔러 자결한다.
그러자 고야자는 자기 한 사람으로 인하여 나라의 기둥인 두 將帥를 죽게 하였으니 해를 보고 살 수 없다면서 그 자리에서 자결하게 되니,
이를 두고 後世 사람들은 二桃殺三士라 일컬어게 되었다.
-參考文軒 : 司馬遷의 史記, 列國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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