史 記

11. ■ 晉文公 과 介子推(2)

동천 2009. 4. 15. 11:07


■ 晉文公과 介子推(2)



여러나라 전전하면서 19年間 겪은 망명생활은 苦難의 연속이었다.

介子推는
晉文公이 망명생활중,피로하고 배가 너무고파 더이상 걷지 못하고
탈진 상태에 있을 때, 자기의 허벅지살을 한덩어리 도려내어 탕을 끓여 문공에게 바치니

晉文公은
그것을 먹고 서서히精神을 회복하고는
자기가 먹은 고기가 介子推의 허벅지살임을 알고는 눈물을 한없이 흘렸다.

이러한 忠臣 介子推가 功臣目錄에 除外되자 많은 사람들은 褒賞이 不公平하다고 하면서 王에게 직접 褒賞을 건의하라고 勸하였으나, 介子推는 오히려 論功行賞을 일삼는 사람들을 경멸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道가 무너지면- 德에 의지할 수 밖에 없고,
德이 무너지면-仁에 의지하고,
仁이 무너지면-義에 의지할 수 밖에 없다.
義가 무너지면 어찌 되는가?-禮에 기대어 지낼 수 밖에 없다.
그런데 禮마져 무너지면 사람들은 힘에 의지할 수 밖에 없다.

힘이란 무엇인가?
바로 출세요,영달이요,성공이다.
내가 主君을 위하여 忠誠한 것은 臣下로서 도리를 다했을뿐
그 代價를 바라고 한 일이 아니다.
라고 하면서

그는 조용히 행장을 꾸려 어머니를 모시고 "강성"을 떠나
故鄕인 綿山(지금의 산서성 개후현) 깊은 골짜기에
정갈한 草廬 한채를 짓고 나무열매를 따먹으며 조용히 지냈다.

晉文公은
그 소식을 듣고 부끄러워하며
직접 사람들을 데리고
개자추의 집을 찾아 갔지만
介子推는 이미 집을 떠나
綿山에 은거 한 뒤였고,

다시 晉文公은 그를 찾아 綿山으로 갔지만 綿山은 산세가 험준하고
樹木이 울창하여 사람을 찾아내기가 여간 쉽지 않았다.

이때 어떤 臣下가 綿山의 三面에서 불을 놓아
介子推를 밖으로 나오게 하자는 것이었다.

이를 허락하여 불을 놓게 했지만 介子推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고,
불이 끄진 後에 사람들은 늙은 어머니를 등에 업은 介子推가 버드나무 아래에 앉아 죽어있는 것을 發見하였다.

이 모습을 본 晉文公은 통곡을 하였다.
그의 시신을 거두어 입관하려 할 때
나무동굴속에 이렇게 쓰여진 血書 하나가 있었다.

살을 王께 바쳐 忠誠을 다한 것은,
王께서 恒常 靑明하시길 바랬기 때문이다.

晉文公은 자신의 政治歷程에 많은 것을 시사하고 죽은
만고의 忠臣 介子推를 그리워하며 그가 쉬고 있는 이 지역을
山西省 "介休面"이라 개칭하였다 한다


또한,
晉 文公은 介子推를 기념하기 위하여 그 날을 "寒食節"로 제정하고,
이 날은 사람들에게 일체 불을 피우는 것을 禁하고
찬 음식을 먹게 했다 한다.

그 이듬해에 晉文公은 臣下들과 함께 山에 올라 祭祀를 지내다가
介子推가 타 죽었던 그 버드나무가 다시 蘇生한 것을 보고는
그 버드나무에 "靑明柳"라는 이름을 하사하여 天下에 알리고,
寒食節 뒷날을 靑明節로 製定하였다 한다.


寒食節과 靑明節에 대한 유래를 기억해 둘 일이다.


參考文軒 : 司馬遷의 史記 , 列局志 中에서

東 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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