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國戰爭秘史

■10.북한의 위장평화공세에 속아

동천 2009. 4. 15. 11:44

    ■10.북한 위장평화공세에 속아

    孫子는 그의 兵書에서
    내가 이길 수 있는 準備는 敵에게 있고,
    敵이 이길 수 있는 準備는 내게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앞서 언급되었던 군 수뇌부의 결정적실책은 일선 방어부대의
    방어태세에 도리킬 수 없는 失策으로 이어지게 된다.

    1950年 6月 12日, 北韓의 7個 師團이 38度線에
    展開하여 침묵을 지키고 공격준비를 완료하고 있을 때

    38線에 배치된 韓國軍 4個 師團(+)은 어떤 狀態下에서 6.25를 맞이했던가 를 살펴보자.

    6·25 남침 2주전인 1950년 6월 11일 조만식 선생과 남로당 총책임자 김삼룡의 교환을,
    19일에는 최고인민회의와 우리 국회를 연합해 통일을 이루자고 하는 북한의 위장평화공세 속임수에
    6월 23일 24시 육군 본부는 全軍에 내려졌던 비상경계령을 해제함으로써 빗장을 풀게 된다.

    북한군이 기습 남침한 25일 일요일 새벽 20만 병력의 인민군이 38선 전역에 걸쳐 밀고 내려왔지만, 국군의 절반 이상은 휴가와 외박 중이었다. *백인엽 大領이 指揮하는 17 獨立聯隊(옹진반도)와 ,
    *임부택 中領이 指揮하는 화천-춘천 축선의 6 師團 7 聯隊를 제외한 全軍이 일제히


    6,25일 하루 전날,
    비상 경계태세를 해제하고
    各 部隊長 재량으로
    部隊員의 1/2 ~ 1/3 兵力을
    휴가, 외출,외박을 실시하였고.

    陸軍本部의 豫備인
    首警司 예하 3 聯隊와 18 聯隊의 경우,
    건제 1個 大隊 全員을 휴가 조치한 狀態에서
    悲劇의 6,25를 맞이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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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東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