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교도 배척 [23] ★한편 <그라티아누스 황제>가 통치하는 제국 서방에서는 원래 기독교가 늦게 침투해서 동방에 비하면 세력도 약하고 교리를 둘러싼 기독교 내부의 항쟁도 줄곧 삼위일체파 주도로 진행되서 곧장 <이교>배척에 착수되었는데 그것은 <그라티아누스 황제>가 "최고 제사장"에 취임하기를 거부한 것으로 시작된다. "최고제사장"은 로마인과 그 주민 공동체인 국가 로마를 지켜준다는 최고신 <유피테르>와 그의 아내 <유노>, 그리고 지혜의 여신 <미네르바>를 모시는 제사장들 중에서 가장 지위가 높은 공직일 뿐만 아니라 로마 건국 당시까지 거슬러 올라갈 만큼 오랜 역사를 가진 공직이다. 이러한 최고제사장직은 기독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 대제도 황제인 동시에 최고제사장이었던 것을 그라티아누스 황제가 <최고제사장>에 취임하기를 거부한 것은 중대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그라티아누스 황제>는 곧이어 로마 건국 당시부터 계속되어온 여사제 제도를 없애는 작업에 착수하는 한편 <이교>의 신들을 모시는 신전 유지비를 충당해온 재원까지 몰수하고 사당들을 폐쇠하게 된다. <그라티아누스 황제>가 <이교>를 배척하기 위해 실시한 마지막 시책은 공화정 시대부터 원로원 회의장 정면에 안치되어 있는 <승리의 여신상>을 철거하는 것이었다. 원로원 회의가 열리는 날은 로마의 승리를 상징하는 이 여신상 앞에 향을 피우고 의원들은 그기에 예배를 드린 뒤에 회의를 시작하는 것이 500년 동안 계속 이어져 내려온 전통이었던 이 여신상을 철거하는 것이다. AD 383년, 파리에 머물고 있던 <그라티아누스 황제>는 반란을 일으킨 브리타니아(영국)지역 사령관 <막시무스>의 공격을 받고 24세를 일기로 막을 내리게 되었고, 열두살의 어린 발렌티니아누스 2세가 제위를 잇기는 하였지만 사실상 <데오도시우스 황제>가 동방과 서방을 합친 로마 제국을 통치하게 된다. 따라서 <그라티아누스>가 추진한 로마 제국의 기독교 국가화가 그의 죽음으로 중단되지 않고 <테오도시우스 황제>에게 계승된 것을 의미한다 東 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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