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國戰爭秘史

■28.倉洞線 防御作戰

동천 2009. 5. 11. 16:34

    ■28.倉洞線 防御作戰

    6月27日 아침,
    서울 防禦의 主陣地로 볼 수 있는
    창동線의 防禦作戰은第 25聯隊가 의정부 남쪽
    백석천 제방을 점령하여 北傀軍의 突進을 저지했고


    의정부 地區 전투사령관에 임명된
    유재흥 准將은 후퇴해 오는 8個 聯隊에 속하는
    將兵을 再編成하여 倉洞 高地線에 配置中이었다.

    將兵들은 서전에서 부터 敗戰만 해와서 戰意는 상실되었고,
    25日 以後 계속된 후퇴로 잠도 자지 못한데다 식사도 하지 못하여
    허기에 지쳐 있는 상태라서 憲兵들이나 독전장교들의 제지를 받고 마지못해 있는 防禦線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8個 聯隊라지만
    各 聯隊 兵力은 1個 大隊 미만이고
    더욱 장비는 개인화기에 불과했다.

    요컨대
    패잔병으로 혼성된 約 5個 大隊가
    창동구릉의 正面 4km에 늘어선 셈이다.

    지휘 조직은 혼란되어 있었고,
    유일한 對戰車 防禦手段으로 보이는 포병은
    포병 학교장 대리 김계원 大領이 지휘하는
    105mm포 5문 뿐이었다.

    우리의 將兵들은
    祖國의 위급을 구하기 위해
    몸을 던져 敵의 戰車를 공격했다.

    그러나
    급조한 폭약으로
    T-34 전차를 파괴할 수가 없었고,
    모처럼 교량을 파괴하고서도 미처 화기를 배치하지 못해
    실효성있는 對戰車 戰鬪를 실시하지 못하였다.

    의정부~서울간의 32km 街道에서
    전개되었던 6月 27日의 對戰車 戰鬪에서
    機械와 肉彈과의 勝負는 너무나 明白하고 참혹한 것이었다.

    이 狀況을 <韓國動亂>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國軍의 젊은 將兵들은
    쏘련제 戰車를 저지시키려고 肉彈으로 공격하고 있었다.

    그러나
    戰車에 타고 있던 野獸들은
    동포의 骨肉이 캐터필러에 깔려
    부서지는 소리를 들어면서 서울을 向해 前進해 왔다.
    전차속에는 韓國말을 모르는 韓國人이 타고 있었다.

    다음에 계속됩니다
    東 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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