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漢江橋 爆破 栽判
當時의 狀況으로 보아 漢江橋 爆破가 너무 조급했기 때문에 韓國軍의 早期 崩壞를 가져 오게 했고, 市民의 피난길을 막아 놓은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누가 爆破 命令을 내렸느냐가 문제가 되어 軍法會議가 열렸고, 蔡秉德 總長은 "軍事知識이 있는 者가 그런 命令을 내릴리 없다." 고 證言했고,
장경근 國防次官 은 "나는 命令하지 않았다"고 主張했다.
結局, 爆藥을 장치한 現場 責任者였던 陸本 工兵監 최창식 大領이 스위치를 누른 責任을 지게 되었다.
崔昌植 大領은 日本 陸士 56期生으로 1年 前인 1949年 6月 9日 工兵監으로 補職된 者로서 50年 9月 21日 釜山 교외에서 총살형을 당하였으며,
以後 최창식 大領의 婦人은 남편의 명예 회복을 위해 항소하였고, 이를 받아들여 1962年에 再審한 結果, 無罪가 되어 그의 名譽는 回復하게 되었지만, 暴破 命令을 한 사람은 아직도 眞實이 가려진 채, 하염없이 세월만 흘러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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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 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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