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國戰爭秘史

■37.서울 陷落

동천 2009. 5. 26. 07:57

■37.서울 陷落

漢江橋가 폭파되었을 때
韓國軍의 主力인 第 2, 3, 5, 7 師團과 首都師團은
서울 외곽방어에 배치되어 있었고,아직 상당한 戰力을
유지하고 있었다.

美 군사고문단이
나룻배로 서울을
탈출한 18時 頃에도
韓國軍은 서울 주변 고지에서 조직적인 방어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北傀軍은 6月 28日 午後에야 이 방어선을 돌파할 수 있었다.

北傀軍이 서울 中央部에 突入한 것은
6月 28日11:30 分 頃이었는데,
韓國軍 第一線 將兵들은 이날 아침까지도
퇴로가 차단되었다는 것도 모르고
수도방위에 목숨을 건 채 싸우고 있었다.

그러나 6月 28日 午前에
서울 市內 東大門 부근의
방어선이 돌파되었다는
것과,漢江橋가 폭파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 서울의
各 部隊는 앞을 다투어
한강변으로 달려 나갔다.

그리고 땟목과 나룻배를
이용하거나 헤엄을 쳐서 漢江을 건너갔는데....
장비의 대부분을 내버리고 渡江했기 때문에
兵士들은 그의 알몸이었다.

해서,韓國軍 主力은 北傀軍의 압력도 거세긴 했지만,
그러나 스스로 漢江橋를 조급하게 폭파하여 퇴로를
차단한 것이 決定的인 原因이 되어 급격히 붕괴되었고,

이로 인하여,
開戰 당시 9萬 4千 名이던 우리 軍이
戰爭 4일째인 6月 28日에는 불과 2萬 2千 名
수준으로 急落하고 말았다.

그런 가운데
아름다운 비극 하나는,
서울의 全 市街를
내려다 볼 수 있는
南山에는 約 1個 中隊의
우리 國軍 將兵들이 最後까지 陣地를 固守하다 全員 殉國했고,

<韓國動亂>에는 "南山에서 最後까지 저항하다 죽어간
將兵들은 분명코 <화랑의 후예였을 것이다>라고
기술하고 그들의 영혼을 찬양하고 있다.

다음에 계속됩니다
東 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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