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漢江橋 早期 爆破
6月27日 밤: 美 軍事 고문관 라이트 參謀長은 蔡 總長이 예고도 없이 陸軍本部를 시흥으로 옮긴 것을 뒤늦게 알고 뒤따라 시흥으로 갔다가 다시 서울로 되돌아 와 고문관들이 이틀 밤이나 잠을 자지 못했기 때문에 그 일부 요원을 숙소로 보내어 수면을 취하게 했다.
![](https://t1.daumcdn.net/cfile/blog/1673471E4A83666275) 副 參謀長 그린윗드 中領도 수면중에 있었는데, 陸本 작전국 고문관 세드베리어 少領의 전화가 걸려 왔다.
"韓國軍이 漢江橋를 폭파하려고 한다." 는 것이다.
세드베리어 少領은 김백일 作戰參謀部長에게 "부대와 보급품.장비 等이 한강 이남으로 渡河하기 前까지 교량을 폭파시켜서는 안된다."고 설득 하였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는 보고 내용이었다.
한강을 건널 수 있는 단 하나 밖에 없는 교량이고 韓國軍의 안전 과 진퇴가 이 교량 하나에 달려 있는데 이를 폭파한다는 보고에 그린윗드 中領은 깜짝 놀랐다.
한강교의 폭파에 관해서는 美 고문단과 菜 總長 사이에 "敵의 戰車가 한강교 근처에 접근 했을 때 폭파한다."고 이미 결정해 놓고 있었다.
그린윗드 中領이 황급히 陸本으로 달려가 보니 作戰參謀部長 김백일 將軍은
"國防長官이 01;30分에 폭파하라고 命令했기 때문에 지금 곧 폭파해야 한다." 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는 사이에 第 2 師團長 이형근 將軍이 들어 와 師團의 병력과 장비가 아직 市內에 남아 있으니 폭파를 연기해 달라고 건의했다.
이 무렵, 蔡 秉德 參謀總長은 이미 漢江을 건너 南岸에 가 있었기 때문에 김 백일 參謀部長이 陸軍本部를 지휘하고 있었음으로 김 將軍은 이형근 將軍의 건의를 받아들여 作戰局長 장 창국 大領에게 폭파를 중지시킬 것을 지시했다.
해서, 장 창국 大領은 짚차로 한강교까지 가려고 했으나 도중에 도로가 피난민으로 메워져 있어 빨리 갈 수가 없어 무질서한 피난민을 헤집고 교량근교 150m 정도까지 이르렀을 때 크다란 섬광과 함께 대폭음이 들려 왔고, 약 10分 後 2 번째의 大爆音이 일어났다.
이리하여 예정시간보다 45分 後인 6,28,02;15分에 한강교는 폭파되고 만다.
당시 다리 위에는 3 열로 늘어선 차량과 피난민이 섞여 南下하고 있었으며,다리 北쪽의 큰 길은 8 열로 늘어서 있는 차량,포차,군 병력,피난민 등으로 뒤섞여 몸을 움직일 수조차 없는 상태였다.
한강교 폭파는 피난민, 군병력, 차량 할 것 없이 두 교각과 함께 날려버렸고, 500~800名의 人命을 희생시키는 한편, 韓國軍 主力의 退路를 차단하고 만다.
다음에 계속됩니다
東 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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