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國戰爭秘史

■46.漢江線 防禦

동천 2009. 6. 12. 14:39

    ■46.漢江線 防禦

    漢江防禦線 準備
    시흥 보병학교장 김홍일 소장은 6월 27일 저녁 때 봉일천의
    제1사단 사령부에서 육군본부로 돌아와 1사단의 철수를 具申하고는
    철수명령의 하달 여부가 분명치 않아 자신이 직접 전달할 작정으로 한강교롤
    나갔는데 한강교에는 전차나 차들이 염주처럼 죽 늘어서서 어떻게 할 수가
    없었으므로 자택으로 차를 돌려 막 집에 도착하자마자 대폭음이 들렸다.

    김 소장은 바로 육군본부로 차를 돌려 가는 도중에 이응준 장군을 만나
    금후의 방침은 한강선을 굳히지 않으면 안 될 것으로 의견이 일치 했으나
    두 사람만의 결정으로 되는 것이 아니어서 육본에 들어가 채병덕 참모총장은 [ 선생님, 이제부터 어떻게 하실 겁니까]하고 물었다.

    김홍일 소장은 [하여간 빨리 한강선의 방비를 굳히지 않으면 안 될 때야]
    하고 답하자 채 총장은 [강문봉이 시흥에 있을 터이니까 그와 의논해서
    시흥지구전투사령부를 편성해서 한강선을 지켜주십시오,
    이응준 각하께서는 수원에서 병력을 수습, 한강선으로 되돌려 보내주십시오]
    하고 구두명령했다.

    그 무렵,김포 비행장에 육박한 북괴군은 제1사단의 퇴로를 차단중에
    있었으며 한강 북안에서는 북괴군이 도강을 서두르고 있는 듯이 보였다.

    시흥지구 전투사령부는 시흥에 낙오자통제선을 설치하고
    삼삼오오로 남하해 오는 장병들을 보병학교에 집결시켰다.
    이렇게해서 6월 28일의 夜半까지 약 3천 명을 집결하여 6개 대대를
    편성할 수 있었었으므로
    ㅡ4개 대대를 제 7사단에,
    ㅡ2개 대대를 수도사단에 배속해서 한강수비를 하게된다.

    그러나 포는 1문도 없고
    제7사단의 중화기는 81밀리 박격포 2문과 중기관총 2정,
    수도사단의 중화기는 81밀리 박격포 3문과 기관총 2정뿐이었다.
    한강교 조기 폭파가 이 같은 결과를 가져오게 한 것이었다.

    ●漢江防禦線 構成
    이렇게 하여 시흥지구전투사령부는 각급 지휘관의 필사의 노력과 투지로
    연대와 대대라 하였지만 기껏 패잔병을 수집한 3~400명 정도의 병력으로
    방어선이 구성되었으니 통상적인 개념의 방어선과는 달리 보잘 것 없는
    것이었다.

    ☞ 混成 第7師團
    유재흥 준장은 사령부를 대방동 수도육군병원에 설치하고
    尹春根 중령의 제 9연대,
    李喜權 중령의 제1연대,
    金炳徽 대령의 제25연대,
    朴基丙 대령의 제20연대의 주력이나 일부 등을 장악하고
    노량진에서 동작에 걸처서의 제방 고지선을 방어했다.

    ☞ 臨時首都師團
    이종찬 대령은 사령부를 又新 국민학교에 설치하고
    徐鐘喆 중령의 제8연대의 주력으로한 제18연대의 제1,3대대,
    유흥수 대령의 제기갑연대 및 임시편성대대를 지휘하여
    여의도를 사이에 두고 대방동에서 신길동과 안양천의 양화교에 이르는 한강 남안에 방어진지를 구축토록 하여 이 兩個 師團을 시흥地區 戰鬪司令部라 稱하고
    步兵學校長 김홍일 少將이 統合 指揮했고,
    後에 韓國軍 第 1 軍團이 된다.

    ☞ 임시편성 제2사단
    보병학교 부교장 林善河 대령은 임시조치로서 제2사단장에 임명되고 서빙고 정면에서 도강해 온 패잔병을 수습해서 그 휘하에
    李尙根 대령의 제 3연대,
    崔昌彦 대령의 제 5연대,
    文容彩 대령의 제16연대로 하여
    한남동 나룻터를 마주보는 新沙里로부터 동작동까지의 한강 남안에 방어진지를 구축하는 한편 과천에다 사단 지휘소를 개설 하였으나 그 실태는 烏合之衆이 강안에 머물고 있었다는 형용이 들어 맞는 것이었다고 전해진다.

    ☞ 김포지구 경비대
    전 제3사단 참모장 禹炳玉 대령은 긁어 모은 약 2천 명을 지휘하고 김포비행장의 확보를 꾀하고 있었으나 점점 더해 가는 적 화력에 압도되어 가고 있었다.

    그 시간에 김홍일 장군은 간밤에 한강 폭파 임무를 수행한 바 있는 제1공병단 및 공병학교 병력을 주축으로 하는 혼성 1개 대대를 편성한 다음 제7사단 정보참모인 李世鎬 소령을 대대장으로 임명하고 어젯밤 폭파 때 실패한 2개 철교를 즉각 파괴하라는 특명을 부여해서 노량진으로 투입시켰다.

    이렇게 방어선을 구축한 다음 김홍일 사령관은 민간인을 동원하여 안양과 시흥 두 곳에 헌병사령관 宋堯讚 대령에게 모든 헌병초소에는 [군인취사장]이라는 안내판을 크게 써 붙이고 사경을 헤치고 퇴각해 오는 장병들은 아무런 죄가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 남하하는 장병들을 무조건 친절하게 할 것이며 그들의 노고를 위로하지는 못할망정 불손한 태도를 취하는 헌병은 이유와 지위고하를 불문하고 엄중 처벌 할 것임을 강조했다.

    이렇게 퇴각하는 병력의 집결이 대강 끝난 것은 6월 28일 밤과 29일 아침 사이였는데 ,김홍일 사령관은 김종갑 참모장에게 가능한 한 그들의 건제를 유지하여 재편성하되 대대병력 단위로 한강 방어선에 투입시키고 있었지만 혼성 부대이기 때문에 저마다 본대를 찾아 슬그머니 흩어지기 일쑤였고,지휘관들은 통신망이 확보되지 않은 상태여서 횡적 협조는 고사하고 종적 계통조차도 서 있지 않은 상태에서 적과 싸워야 했다.

    한강의 교통 수단으로는 6개의 나루터와 2개의 인도교,그리고 3개의 철교가 있다.그 중 공병에 의해 광진교와 한강 대교,그리고 경인간 하행선 철교는 逕間의 일부가 완전 절단되어 사용 불가능하게 되었지만 경인간 상행선 철교와 경부복선 철교는 남쪽으로부터 세번째 경간의 침목 일부와 철로의 일부만이 파괴되고 골재는 그대로 남아 있어서 오늘 아침 장병일부가 차량과 함께 그 교량을 이용하여 철수해 올 수 있었다고 하니 보수만 잘하면 적의 탱크가 건너올 가능성도 없지 않았다.

    한편, 김포반도로 남하하는 북괴군에 의해 한강선의 왼족 끝은 6월 28일 저녁때에 벌써 위험에 봉착하고 있었고봉일천선에 남게 된 백선엽 대령이 이끄는 제1사단은 幸州와 二山浦의 나루터에서 이날밤의 도강을 준비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 무렵 폭파에 실패한 중간 단선 철교를 따라 남하하는 국군 장병이나 피난민의 행렬이 이어지고 있었고 이러한 상황은 강안에 진출한 북괴군에게도 보고있었을 것이므로 북괴군이 이 시점에 단선교를 이용하여 도강한다면 6월 28일 오후에는 영등포를 점령했을 지도 모른다.

    이 무렵의 한강 방어선은 방어선이 구성되지 않았을 때 였으므로 하늘이 도움이었던지 그날 밤 북괴군은 스스로 戰機를 놓치고 있는 것이었다.

    6월 28일 02:30분 한강교가 폭파되고 6월 28일 저녁부터 29일 밤 사이에 김포 비행장 북쪽에서 서쪽을 방어하던 제15연대장 최영희 대령의 비범한 재능과 실행력으로 백선엽 대령이 이끄는 제1사단 의 도강을 엄호하여 사단 주력의 도강을 성공 할 수 있었으며 최 대령의 기지가 없었드라면 국군 제1사단은 궤멸하고 말았을 지도 모르며, 수도 사단의 측면과 배후늠 6월 29일 미명에 공격 당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陸軍本部

    6,28일 밤의 육군본부의 상황에 대하여 공군참모총장 김정렬 장군은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28일 밤, 문득 채 총장을 쳐다보자 의자에 앉은 채 정신없이 자고 있다.張都映 정보국장은 눈을 뜨고 있지만, 잠든 숨소리를 내고 있었다.
    작전국 차장 李致業 중령은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나는 어젯밤에 잠을 잣기 때문에 나은 편이었으나, 결국 육군본부의 수뇌는 실의와 과로와 수면 부족이 겹쳐져서 정신없이 자고 있었던 것이 실정이었다.
    그런데 이치업 중령이 문득 일어서서 [총장 각하,전화입니다]고 한다. 채 총장은 깜짝 눈을 뜬다. 그러나 그 방에는 전화가 없기 때문에 전화가 걸려올리는 없다.
    그래서 다시 잠이 들자 이 중령이 다시 또 [전화입니다]하고 일어선다.

    아마 오늘 아침까지 계속 울려대던 전화 꿈을 꾸기라도 한 모양이었으나, 너무 자주 일어서므로 좋은 말로 타일렀다.

    이렇게 육군본부의 기능은 6월 28일은 종일 정지되고 있었다.


    다음에 계속됩니다

    東 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