古 史

65. 韓信의 最後(2)

동천 2009. 8. 15. 16:06

韓信의 最後(2)

여태후는 漢高祖 유방이 모반을 일으킨 "진희"를 잡아 죽였으니 군신들이 모두 궁중에 모여 축하연을 하게 되었으니 韓信도 참석하라고 거짓으로 꾸며 韓信을 포박하고 심문한다.

韓信이 하나하나 협의를 부인하고 있었으나 여후는 비정한 살기까지 번득이며 말했다.

"나는 네가 魏-趙-燕-齊 네 나라 王을 사로잡거나 항복받고 패왕 항우를 해하에서 이겼다기에 兵法뿐만아니라 권세의 이치에도 밝은 줄 알았다.

또 六國 中에서도 맏형 격인 齊나라와 楚나라에서 王 노릇까지 하였으니 王者의 權道 역시 얼마간은 깨쳤을 줄 알았다.
그런데 너 어찌 이리 아둔하냐? 아직도 네가 왜 죽는지를 알지 못하는구나."


묶인 채 무릎 꿇린 韓信을 잠시 한심한 듯 내려보다가 이어 여후가 선고라도 내리듯 말했다.

"네가 죽는 것은 모반을 꾀했기 때문이 아니라, 네 용략이 네 임금을 떨게 한 탓이다.그르나 네가 떨게 한 임금은 지금의 황상이 아니다. 당장 모반을 일으킨다 해도 너는 결코 우리 황상을 이기지 못한다. 하지만 그 뒤를 이을 태자는 다르다."

"아마도 태자의 文弱은 아마도 너를 당해 내지 못할 것이다. 너는 이제 그런 太子의 時代를 위해 황상께서 돌아오시기 전에 죽어주어야겠다."

"정도에서 너를 사로잡고 陳땅에서 너를 옭았을 때처럼 네 몇 마디면 또 마음이 물러져 살려 두고 부릴 궁리나 하실 터이니, 이번에는 너를 살려 놓을 수가 없구나!"


이렇게 하여 한신을 처형하고,그의 삼족을 멸하였으니, 역사속의 그날이 지금으로 부터 2,202년(BC 196년) 9月11日의 일리다.

"한신"은 죽기전에“내가 "괴철"의 말을 듣지 않아 오늘이 있게 되었다.”라고 탄식하였다 한다



이렇게 죽은 韓信의 죽음을 두고 태사공 司馬光은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世上 사람들은 간혹 한신을 두고 이렇게 말한다.
"한신은 남보다 앞서 큰 계책을 세우고 高祖와 함께 漢中에서 일어나 三秦을 평정하였다."

"이윽고 병력을 나누어 北으로 위나라를 무찌르고, 代나라를 아울렀으며, 趙나라를 무너뜨리고, 燕나라를 위협해 항복을 받아 냈다.
東으로 齊나라를 쳐부수어 차지하고,
南쪽으로는 垓下(해하)에서 楚나라를 쳐 없앴으니,
무릇 漢나라가 천하를 얻게 된 것은 그의 모두가 韓信의 공이라 할 수 있다."

"괴철의 말을 듣지 않은 것과 陳땅에서 교외까지 나가 고조를 맞이한 것을 보아도 어찌 그에게 모반할 마음이 있었다 할 수 있겠는가."
"실은 초왕의 직위를 잃자 불평과 불만으로 시뜻해하다가 급기야 悖逆(패역)에 빠진 것이다."

"노관"은 高祖와 한 마을에서 자란 옛정으로 燕나라의 王노릇을 하는데,
韓信은 그저 열후로서 조정의 명이나 받들게 되었으니,어찌 고조 또한 한신을 저버린 것이 아니라고 하겠는가."

"내가 보기에도 고조가 속임수와 끼를 써서 한신을 陳나라 땅에서 사로잡은 것을 저버림이라고 한다면 그런 면이 있다.허나 비록 그러하다 해도, 한신 또한 이를 불러들인 면이 있다."

처음에 漢나라가 楚나라와 "형양"을 사이에 두고 힘겹게 맞서고 있을 때, 韓信은 齊나라를 쳐 없애고도 돌아와 그 일을 아뢰지 않고 거기에 눌러앉아 스스로 王位에 올랐다.

그 뒤 漢나라 軍士가 楚나라 軍士를 추격해 固陵(고능)까지 갔을 때도 高祖는 韓信과 함께 楚나라 군사를 치기 바랐으나, 韓信은 끝내 그리로 오지 않았다.이때에 이르러 高祖는 이미 韓信의 마음을 알아차렸지만 그를 어찌 못한 것은 그럴 힘이 모자람을 헤아렸기 때문일 뿐이다.

그런데 天下가 이미 평정된 후, 어찌 高祖가 다시 韓信에게 의지할 수 있겠는가. 기회를 틈타서 利得을 쫓는 것은 저잣거리의 잡된 뜻이요, 세운 功에 응당하게 갚고 恩德에 보답하는 것은 배움 깊고 덕망 높은 君子의 마음이다.

韓信은 시정 잡배의 마음으로 자기 잇속을 차리면서, 남에게는 군자의 마음을 바라고 있었으니, 또한 어찌 어렵지 않겠는가.

이 때문에 사마천은 말 하였다."

"만약 韓信이 道理를 배우고 겸양하여 자기의 공로를 내세우지 않고, 자기의 재주를 자랑하지 않았다면, 漢나라에 세운 공훈이 周나라의 周公이나 召公 , 太公과 견줄 수도 있었을 것이며,

後世에까지 나라의 祭享(제향)을 받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되려고 애쓰지 않고 天下가 이미 安定된 뒤에 반역을 꾀하였으니, 宗族이 모두 죽음을 당한 것 또한 마땅하지 않은가."


다음에 계속됩니다
 
     -參考文軒 : 楚漢志 中에서-

東 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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