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陳 倉(진 창)
때는 B.C. 206년 8월, 漢王 유방은 咸陽을 버리고 팽성으로 향하는 항우의 좁은 識見을 볼때 天下를 경영할 人材가 아니라는 것에 실망하고 한신을 대장군으로 봉하여 천하 쟁패길에 나서게 된다. 韓信은 劉邦의 실세인 번쾌로 하여금 500명의 군사를 주어 불태웠던 잔도를 再建하는 척하여 장함의 5萬 主力軍과 눈과 귀를 잔도(棧道)와 식(蝕) 골짜기에 묶어 두고 6萬 大軍을 이끌고 大散關-陳創- 폐구로 우회하여 고도현의 옛길로 향하였다.
陳倉을 코 앞에 두고 폐구의 관문인 요충지인 大散關에 이르런 때가 8月 초순의 초가을이었다.
陳 倉은 秦나라 때부터 함양 百萬 人口가 먹을 곡식을 모두 그 곳에 갈무리 했던 기름진 땅이었으며, 秦나라가 亡한 뒤에는 擁王 "장함"이 도읍으로 삼고 있는 "폐구"의 穀倉으로 쓰고 있는 곳이다.
大散關에서 하루를 쉬는 사이에 내리기 시작한 가을 비는 다음날 날이 밝아도 그칠 줄 몰랐다. 漢軍은 하는 수 없이 하루를 大散關에서 더 쉬었으나 가을비는 그다음 날도 멎지 않았다.
韓信은 행군을 더 미룰 수 없어 빗속에 대군을 출발시켰다. 그런데 陳創으로 가는 길이 위수 강변의 황토흙이라 이틀이나 내린 비로 곤죽이 되어 있었다.
짐을 실은 수레바퀴는 길바닥에 박혀 움직이지 않았고 사람이나 말조차 앞으로 나아가기가 어려웠다.
바닥이 질어 곤죽이 된 길을 "진창길"이라 하는데 俗說로는 그 말이 바로 그 때 漢軍이 陳創으로 가면서 지나야 했던 그 길에서 由來되었다고 한다.
參考文軒: 司馬遷의 史記, 列局志 中에서
東 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