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興南 撤收作戰
▶ 서북쪽의 상황 변화로 미 제10군단은 흥남지구에서 고립되기에 이르렀고, 원산을 점령하고 있던 미 제3사단이 11월 20일 장진호전투 지원차 북상하였기 때문에 원산에 잔류한 한국 해병대를 포함한 4,000 여명만으로는 중공군에 포위, 고립될 것을 우려하여 12월 9일 모두 해로로 철수해 버림으로써 결국 함흥 ~ 원산간의 동해안 육로는 사용 불가능하게 되었다. 따라서 미 제10군단은 해상철수 외 선택의 여지가 없는 상황이었고, 중공군으로서는 완전 포위권내에 들어있는 미 제10군단을 섬멸시킴으로써 UN군의 우익의 소멸시켜버리고 이어 38도선 이남지역까지 신속하게 진출하고자 기도했다. 이러한 작전기도 하에 중공군 제9병단 예하 5개 사단과 북괴군 제 4,5군단이 함흥, 흥남 외곽까지 접근, 압박을 가해오고 있었다. ▶ 國軍 第1軍團 狀況은 ☞ 11월 5일, 서부전선 제 8군이 청천강 기슭까지 밀려졌을 때 한국군 제 3사단은 길주에 입성하였고, 재보급을 받지 못한 장병들은 여름옷을 입은 채 눈 덮인 咸鏡 山脈을 넘어 合水와 白岩으로 向하라는 명령을 받았는데 이대로 계속 진군하다가는 동사해버릴 것 같아 방한외투를 보급 받아 진격을 계속하여 ☞ 11월 30일 한국군 제1 군단의 전선은 白岩-회령 남쪽 45km의 富寧 - 富巨洞을 연한 선까지 진출했고 보급만 원만하다면 이제 단숨에 국경선을 돌파할 거리였다. 바로 그 시점에 [미 제10 군단의 지휘 하에 들어가 해상 철수하라]는 생각지 않았던 명령이 하달된 것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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