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兵法家들] 落第生인 孔子는 司馬穰苴의 찬란한 成功과는 달리 齊나라에서 登龍되지 못하자 여러나라를 두루 돌아다녔지만 그를 採用해 주는 나라는 하나도 없었다. 孔子는 가는 곳마다 面接에서 落第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때 孔子는 서글픈 流浪을 繼續하면서 저 너른 벌판에 定處도 없이 彷徨하는 이 몸은 소도 범도 아닌 꼬리 긴 여우 여우는 그래도 저 풀숲 그 속에 편히 쉴 집이 있거니. 이렇게 詩經 大雅篇의 <何草不黃>의 한 句節을 읊조렸을 것이다. 반면에 사마양저에 의해 나라의 기틀이 닦인 뒤로 전쟁 경기가 계속되어 제나라 수도에는 날이 갈 수록 풍기는 점차 문란하여 강태공이 심어 놓은 質朴과 剛健의 기풍은 간 데 없고 사치와 방탕의 풍조가 휩쓸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세태와는 대조적으로 <사마법>의 정신은 전씨의 왕실에 상속되어 대대로 국왕들은 학자를 우대하고 학술을 장려하여 田騈,孫殯,王孫賈,田單,魯仲連 같은 一代의 學者,兵法家,政治家 等 2千 餘名이 稷山 아래 모여 前無後無한 學界의 장관을 떨쳤다. 다음에 계속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