兵 法

■ 35.司馬穰苴

동천 2011. 11. 25. 09:19
[兵法家들]


■ 35.司馬穰苴

왕족인 孟嘗君도
학자,변론가,병법가,정치가 등 지식인 3천명을 식객으로 거느리고 있었고,

그를 찾아오는 모든 지식인들을 우대하여 머물고 싶은 데로 머물게 했던 것이다.

그런데 자칭 지식인이라고 자부하는 젊은 학도들이란
다루기 어려운 존재이어서 이들을 통제하는 권위가
없을 때에는 오히려 그들은 불평을 일으켜국가의
해독이 되는 수가 많다.


제나라의 국운이 차츰 기울어지자
그 많은 학자들에게 만족스러운
대우를 하기에는 국가 재정이 부족하였고,

따라서 학자들의 생활에도 점점 궁기가 끼이게 되어
드디어 학자가운데 적국의 뇌물을 받고 간첩행위를
하는 자가 늘어나 이로 인하여 齊王 建王은 진나라에
사로잡혀 가 松栢이 우거진 숲속 작은 암자에 감금되어
감시병의 심한 감시속에서 고독한 나날을 보내다가
드디어 영양실조로 덧없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 參考文軒 : 世界兵法大全集. 史記, 列局志-

다음에 계속됩니다
EastLive
司馬穰苴

■ 35.司馬穰苴 찬란히 꽃피기 시작했던
司馬穰苴의 時代에서,
枯木이 시들어 落葉이
우수수 떨어지던
건왕 시대에 이르는
田氏의 齊나라는
대단원의 幕을 내려지고
다음과 같은 挽歌만이 길이
後世에 傳할 뿐이다.

소나무 잣나무
우거진 숲 속
오늘도 나무 끝에
해가 저무네
임금님이 좋은 건
솔일까 잣일까
아니 아니 솔도 싫고
잣도 난 싫어
학자들 어디 가고
임금님 혼자
오늘도 숲 너머로
해는 저무네.

司馬穰苴 연재,
여기까지 입니다.
감사합니다.
 
     -參考文軒 : 世界兵法大全集-  
東 川
吳 起

그르면 現 世態와는 극명하게 對別되는.
吳子의 人生 歷程을 한번 보자.

그의 本名은 吳起이다.

그는 2,400年 前,
衛나라 사람으로 본디 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젊었을 때
아버지 財産을 물려받았지만 가운을
일으키기는 커녕 요즘말로 망나니
문제아였던 모양이라 매일같이 방탕한
생활을 했기 때문에 드디어 집안이 破産之境에
이르러 주위 사람들로 부터 많은 嘲笑를 받기에 이른다.

하지만
그는 어렸을 때부터 兵法을 공부하여
이로써 立身出世할 뜻을 품고 있던 터에
家産을 탕진한 自己를 비웃는 무리 30餘 名을 한칼에 죽여
분함을 풀고 그길로 자기나라를 떠나 魯나라로 가게 된다.


그런 후,吳子는 어머니와 헤어질 때,
"어머니,저는 기필코 立身揚名한 뒤
錦衣還鄕하여 어머니를 찾아뵙겠습니다.
만일 제가 出世하기 전이라면 설사 어떠한
事情이 있을지라도 결코 故鄕에 돌아오지 않겠다면서"
다음과 같은 시 한수를 남기고 떠난다.

男兒立志出鄕關 :사나이 뜻을품고 고향을 떠나오니
學若無成死不還 :배워서 대성못하면 돌아가지 않으리
埋骨豈有憤墓地 :백골을 묻을 곳 어찌 고향뿐이리
人生到處有靑山 :인생 가는 곳마다 청산있거늘...


다음에 계속됩니다
 
     -參考文軒 : 世界兵法大全集-

東 川

[兵法家들]


■ 33.司馬穰苴

孔子는 가는 곳마다 面接에서 落第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때 孔子는 서글픈 流浪을 繼續하면서
저 너른 벌판에
定處도 없이
彷徨하는 이 몸은
소도 범도 아닌
꼬리 긴 여우
여우는 그래도
저 풀숲 그 속에
편히 쉴 집이 있거니.


이렇게
詩經 大雅篇의 <何草不黃>의 한 句節을 읊조렸을 것이다.


반면에
사마양저에 의해 나라의 기틀이 닦인 뒤로
전쟁 경기가 계속되어 제나라 수도에는 날이 갈 수록
풍기는 점차 문란하여 강태공이 심어 놓은 質朴과 剛健의
기풍은 간 데 없고 사치와 방탕의 풍조가 휩쓸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세태와는 대조적으로
<사마법>의 정신은 전씨의 왕실에 상속되어
대대로 국왕들은 학자를 우대하고 학술을 장려하여

田騈,孫殯,王孫賈,田單,魯仲連 같은
一代의 學者,兵法家,政治家 等 2千 餘名이
稷山 아래 모여 前無後無한 學界의 장관을 떨쳤다

- 參考文軒 : 世界兵法大全集. 史記, 列局志-

다음에 계속됩니다
EastLive
司馬穰苴

맹자도 鄒나라에서
찾아와 齊宣王 을 만나
면접을보았으나 등용되지
못하여 떠난 일이 있다.

제나라에 전해 내려오는
묘한 정책의 하나는 학자를 우대하면서도 관직을 주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晏子의 發案으로
공자와 같이 덕망 높은 사람을 적으로
만든다면 정신적으로 국가의 큰 손실이지만,
그렇다고 하여 그의 왕도정치는 제나라 국책에
위배되기 때문에 물질적으로는 후대를 하지만 권력을
주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 뒤에 맹자가 다시 찾아와 왕과의 면접에서
<인의>의 정치를 주장하였지만,
선왕에게는 馬耳東風格이었다.

맹자도 공자와 마찬가지로 낙제생이 되고 말았다.

<사마법>을 응용하고 있는 제 나라에서는
맹자를 대신과 같은 대우를 했지만, 그의 의견은
하나도 채택되지 않았기 때문에 맹자는 극진한 우대를
함에도 불구하고 이를 박차고 쓸쓸한 나그네의가 되었던 것이다.

맹자가 떠나는 것을 끝까지 왕은 만류하려 했지만,
이는 공자가 떠날 때에도 쓴 상투적인 수단에 불과했다.


다음에 계속됩니다
 
     -參考文軒 : 世界兵法大全集-  
東 川
司馬穰苴

왕족인 孟嘗君도
학자,변론가,병법가,정치가 등 지식인 3천명을 식객으로 거느리고 있었고,

그를 찾아오는 모든 지식인들을 우대하여 머물고 싶은 데로 머물게 했던 것이다.

그런데 자칭 지식인이라고 자부하는 젊은 학도들이란
다루기 어려운 존재이어서 이들을 통제하는 권위가
없을 때에는 오히려 그들은 불평을 일으켜국가의
해독이 되는 수가 많다.


제나라의 국운이 차츰 기울어지자
그 많은 학자들에게 만족스러운
대우를 하기에는 국가 재정이 부족하였고,

따라서 학자들의 생활에도 점점 궁기가 끼이게 되어
드디어 학자가운데 적국의 뇌물을 받고 간첩행위를
하는 자가 늘어나 이로 인하여 齊王 建王은 진나라에
사로잡혀 가 松栢이 우거진 숲속 작은 암자에 감금되어
감시병의 심한 감시속에서 고독한 나날을 보내다가
드디어 영양실조로 덧없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다음에 계속됩니다
 
     -參考文軒 : 世界兵法大全集-  
東 川
司馬穰苴

찬란히 꽃피기 시작했던
司馬穰苴의 時代에서,
枯木이 시들어 落葉이
우수수 떨어지던
건왕 시대에 이르는
田氏의 齊나라는
대단원의 幕을 내려지고
다음과 같은 挽歌만이 길이
後世에 傳할 뿐이다.

소나무 잣나무
우거진 숲 속
오늘도 나무 끝에
해가 저무네
임금님이 좋은 건
솔일까 잣일까
아니 아니 솔도 싫고
잣도 난 싫어
학자들 어디 가고
임금님 혼자
오늘도 숲 너머로
해는 저무네.

司馬穰苴 연재,
여기까지 입니다.
감사합니다.
 
     -參考文軒 : 世界兵法大全集-  
東 川
吳 起

그르면 現 世態와는 극명하게 對別되는.
吳子의 人生 歷程을 한번 보자.

그의 本名은 吳起이다.

그는 2,400年 前,
衛나라 사람으로 본디 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젊었을 때
아버지 財産을 물려받았지만 가운을
일으키기는 커녕 요즘말로 망나니
문제아였던 모양이라 매일같이 방탕한
생활을 했기 때문에 드디어 집안이 破産之境에
이르러 주위 사람들로 부터 많은 嘲笑를 받기에 이른다.

하지만
그는 어렸을 때부터 兵法을 공부하여
이로써 立身出世할 뜻을 품고 있던 터에
家産을 탕진한 自己를 비웃는 무리 30餘 名을 한칼에 죽여
분함을 풀고 그길로 자기나라를 떠나 魯나라로 가게 된다.


그런 후,吳子는 어머니와 헤어질 때,
"어머니,저는 기필코 立身揚名한 뒤
錦衣還鄕하여 어머니를 찾아뵙겠습니다.
만일 제가 出世하기 전이라면 설사 어떠한
事情이 있을지라도 결코 故鄕에 돌아오지 않겠다면서"
다음과 같은 시 한수를 남기고 떠난다.

男兒立志出鄕關 :사나이 뜻을품고 고향을 떠나오니
學若無成死不還 :배워서 대성못하면 돌아가지 않으리
埋骨豈有憤墓地 :백골을 묻을 곳 어찌 고향뿐이리
人生到處有靑山 :인생 가는 곳마다 청산있거늘...


다음에 계속됩니다
 
     -參考文軒 : 世界兵法大全集-

東 川

吳 起

때는 春秋時代 末期

魯나라에 이른 吳子는
孔子의 弟子인 曾子를
찾아가 그 門下에서
얼마동안
儒敎를 배우면서 때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吳子가 한창 증자의 문하에서 儒學에 힘쓰고 있을 때
故鄕으로부터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悲報가 날라왔다.

吳子는 부음을 받고도 뜻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연유로 부모의 장례를 치루러 가지 않았다.


그러자 孝經의 著者이며
孝를 人倫의 가장 높은
道德으로 尊重하는
曾子는 吳子의 處身을
용납할 수 없는
背德行爲라 하여 그의
門下에서 追放하고 만다.

曾子의 門下에서 쫓겨난 吳子는
이제 자기에게는 兵法으로서 出世하는 길밖에 없다
생각하고 더욱 분발하여 兵法硏究에 몰두하게 된다.


다음에 계속됩니다
 
     -參考文軒 : 世界兵法大全集-

東 川

吳 起

吳子는
일찌기 古`今의 兵法과
軍略을 硏究하여 機會를
기다리던 중 壯年이 되어서야 魯나라 軍隊의 한 參謀로 부임하게 된다.

그의 아내는
齊나라 女子로
젊고 아름다웠으며,
그는 아내를 무척 사랑하였다.
그 사랑하는 아내가 그의 生崖에
悲劇의 原因이 되리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吳子가
魯나라에서
軍部에 복무하면서
차츰 頭脚을 나타낼 무렵
이웃의 齊나라 大軍이 쳐들어왔다.

이 어려운 國亂을 無事히 넘기기 위해
軍部內에서는 吳子를 將軍으로 任命하여
一線에 내보내라는 소리가 높아갔다.

그러나 朝廷의 一部에서는
그의 아내가 敵國인 齊나라 女人이었음으로
魯나라에 대한 吳子의 忠誠心을 믿을 수 없다면서
一部에서는 反對하고 있었다.


다음에 계속됩니다
 
     -參考文軒 : 世界兵法大全集- 

東 川

吳 起

한편,

戰國七雄 中에
强國인 齊나라 軍은
首都 곡부성까지 進擊하여
都城이 陷落되는 것은
時間問題였고,
重臣會議에서는 降伏쪽으로 기울어져 가고 있었다.

이대로 있다간 魯나라가 亡할지도 모른다.大를 위해서는.....
吳子는 순간 칼을 빼어들고 아내의 목을 친다.
그리고 그는 아내의 목을 들고 重臣會議場으로 달려들어갔다.

여러분 이래도 나를 못믿겠소?
나를 卽時 將軍으로 任命하라.
齊나라 軍士가 몇만이라도 기어코 이를 擊退시킬 것이다.



이튿날 새벽, 그는 군사 3 千名을 거느리고
城밖으로 나가 齊나라 陣地를 奇襲하여
勝利에 도취되어 단잠을 자던 敵을 모조리 擊破해 버렸다.

以後,
吳子는 魯나라의 上將軍이 되어 많은 戰鬪에서 連戰連勝하자 重臣들은 그의 威勢를 두려워하여 그를 失脚시키려고 劃策하게 된다.


다음에 계속됩니다
 
     -參考文軒 : 世界兵法大全集- 

東 川

'兵 法' 카테고리의 다른 글

37.吳 起  (0) 2011.11.26
36.吳 起  (0) 2011.11.25
■ 34.司馬穰苴   (0) 2011.11.24
■ 33.司馬穰苴  (0) 2011.11.23
■32.司馬穰苴   (0) 2011.1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