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負薪救火
11월14일 서울시청앞 서울광장에서의 불볍폭력시위는 우리를 슬프게 했다.
공권력이 이렇게 무너진 것인가. 아니면 공권력앞에서 광폭하는 시위대가 너무한다는 비난을 사서 표라도 얻어보려고 방조하는 것인가?
나라가 망하는 까닭은 그 신하와 관리가 모두 어지럽게 만드는데 힘쓰고 다스리는데 힘쓰지 않기 때문이다. 나라가 어지럽고 약한데도 모두들 나라 법을 내던져버리고 바깥 일만 사사로이 한다면 이는 섶을 진 채 불을 끄겠다는 격이다.
1975년 베트남이 공산화 될 당시 월남의 패퇴를 예상한 사람은 그의 전무였다.
58만명의 병력에 미군이 넘겨준 첨단 무기들로 월남군의 전력은 세계 제4위 수준이었다. 경제력도 월남이 압도적 우위였다.
반면 월맹군은 소금만 갖고 하루 두 끼로 연명하는 비참한 신세였다. 그러하면서도 월남은 월맹군의 침공 4개월여만에 허망하게 항복했다.
이유가 무엇이었을가? 전문가들은 월남에 만연했던 부정부패와 전쟁 피로증 같은 표면적인 현상 외에 민주화 인사로 위장해 월남의 신경망을 장악 마비시킨 간첩 세력을 꼽는다.
"외세를 끄어들여 동족들끼리 피를 흘리는 모습을 우리 조상이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얼마나 슬퍼하겠는가.대통령에 당선되면 北爆을 중지시키고 남북문제를 평화적으로해결하겠다."
1967년 9월 월남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11명의 입후보중 차점으로 낙선한 야당 지도자 [쭝딘쥬]은 이런 선동성 연설로 반전 여론을 부추기며 월맹에 대한 포용정책을 주창했다.
유명 도지사였던 [녹따오] 등이 월맹과 내통해 안에서부터 월남을 무너뜨린 대표적인 "붉은 민주 투사"들이다. 이들은 9,500명의 비밀 공산당원 과 4만명의 인민 혁명당원 등을 합쳐 월남 총인구의 0.5% 남짓했다.
하지만, 정치권과 시민.종교단체.언론 등에 침투한 이들은 "親월맹-反美감정"확산 등을 통한 월맹의 공산화통일전선 공작의 선봉장이었다.
한 전직 월남 주재 외교관은 "마지막 대통령이었던 티우의 비서실장도 간첩이었다"고 전했다. 월맹에 대한 이들의 충성은 맹목적이었다.
하지만 "붉은 민주 투사"의 말로는 비참했다. 자본주의에서 반정부활동을 하던 인간들은 사회주의에서도 똑같은 짓을 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에서 대부분 체포.처형당하고 만다.
티우 정권시절 반미주의를 외치던 [도안 토아이]전 사이공대 학생회장은 뒤에 "월맹 공산주의자들에게 우리는 완전히 속았다. 수많은 양심인사들이 수용소에서 죽어갔다."고 폭로했다.
이러한 역사적 교훈을 직시, 공권력을 강화하여 나라의 기강을 바로잡아 나라의 근간을 흔드는부정부패 와 민주투사를 가장한 친북 좌파들을 척결해 나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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