丙子胡亂

▣三學士

동천 2016. 9. 11. 06:09

▣三學士

■ 청군이 철수할 때,
홍익한은 평양서윤으로 있었다.

■1637년 2월 12일,
조정은 증산현령 邊大中에게
심양으로 압송토록 하였다.

용골대 :
"너의 나라 신료들 가운데
척화를 주장하는 자가 퍽 많은데,
어찌 유독 너만 끌려왔는가?"


홍익한 :
"작년 봄에 네가 우리나라에 왔을 때 訴를 올려
너의 머리를 베자고 청한 것은 나 한 사람뿐"이라고 응수했다.


홍타이지는 홍익한을 전향시키려 갖은 회유책을 썼지만
"나는 조선의 신하이자 명의 신하이니 그대들 오랑캐와는
타협할 수 없다"는 말을 듣고 그의 의지를 확인한 홍타이지는
곧바로 그를 처형했다.

■ 1637년 4월 15일,
윤집과 오달제는 청군 후발대에 이끌려 심양에 도착했다.

■ 4월 19일,
용골대가 두 사람을 앉혀 놓고 홍타이지의 말을 전했다.
"너희들이 척화를 외쳐 두 나라의 틈이 생기게 했으니
그 죄가 매우 중하다. 죽여야겠지만 특별히 살려주고자 하니
처자를 대려와 이곳에서 살겠는가?


윤집 : 난리 이후 처자의 생사를 알 수 없다"

오달제 :
고통을 참고 이곳까지 온 것은 만에 하나라도 살아서
돌아가면 우리 임금님과 노모를 다시 보기 위해서였다.
고국에 돌아갈 수 없다면 죽는 것만 못하다.속히 죽여달라.


격분한 용골대는 그들을 묶어다 심양 서문 밖에서 죽였다.
청인들은 시신을 수습하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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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 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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