任辰倭亂

7.太平會盟圖

동천 2018. 4. 4. 20:07

太平會盟圖


■ 7.晉州城


日本軍은 9個 梯隊로써 明나라를 치기 위해 빠른 속도로 北上했다.
제1선봉대 고니시유기나가 부대는 平壤으로,
제2선봉대 가도기오마사 부대는 咸慶道까지 進出했다.
朝鮮은 全羅道 地域과 平安道 一部 地域을 제외한 全 地域이 日本軍에
내주게 된 것이다.

징비록에 日本軍 제1선봉장 고니시유기나가가
宣祖를 威脅하는 내용이 있다.

"日本軍 10여만명이 또 西海 바다로 부터 오게 되니
大王의 行次는 이곳으로부터 어디로 가시렵니까? "
라고 하면서 降伏하라고 威脅을 가했었다.


그것은 日本軍의 基本戰略인 水陸倂進을 전제로 한 戰略을 말하는 것이었다.

■일본군이 김해,창원을 함락하고 영산-창녕으로 진격할 무렵인
1592년 4월22일 郭再祐 將軍은 의병을 이르킨다.

그는 의령,창녕,현풍 등지에서 침략군을 격파하고 부산에서 진주를 거쳐
호남으로 진출하는 2만 일본군을 낙동강과 남강 합류지점
정암진에서 격파, 호남 진격을 저지하였다.
6월 이후
충청도의 조헌,
경상도의 정인홍,김면,손인갑,김준민,
전라도의 고경명,유팽로, 김천일,김덕령,
함경도의 정문부, 휴정,유정 등
全國 各地에서 봉기한 義兵들의 활약으로 戰勢가 점차 逆戰 되고 있었다.

■ 한편, 戰爭 4개월만인 1,592년 7월 8일,
李舜臣 將軍은 閑山島앞 海戰에서 일본함대 59척을 擊破하고
9천여명을 수장시킨다.

이 한산대첩으로 日本軍의 水陸倂進政策은 저지되었고
朝鮮은 西海바다와 全羅道를 保存할 수 있었다.

이렇게 해상이 봉쇄되자 일본군은 다시 육로로 전라도의 진격로를 찾았고,
그 길목에 晉州城이 있었다.

東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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