史 記

15.吳 越 同 舟

동천 2009. 4. 19. 12:42


吳 越 同 舟

이말은
春秋時代 末期,
吳, 越 두나라의 복수로 얼룩진 戰爭史에서 비롯된 말이다.

吳王 합려(闔慮)는 名宰相 伍子胥의 도움으로
B.C.497年들어 超 强大國 楚나라까지 굴복시킨 後

餘勢를 몰아 평소 앙숙으로 지내던 인접 小國 越나라를 侵攻하였다가,
越의 特攻隊로부터 奇襲을 받아 큰 부상을 입은채 敗退하게 되고,
闔閭는 戰爭에서 입은 傷處가 惡化되어 다음해 여름
죽고마는 事件이 발생하였다.


<吳王 "闔閭"가 名劍을 試驗하기위해 칼로 바위를 잘랐다는 試劍石>

闔閭의 뒤를 이어
吳나라의 帝位에 오른 이가 둘째 아들 부차라는 임금이다.

부차왕은 아버지의 원수를 잊지 않기 위해
10 여명의 侍者를 궁중 곳곳에 배치하고
王이 나타날 때마다

부차야 ! 너는 越王이 네 애비를 죽였다는 사실을 절대로 잊지 말라
부차야 ! 너는 네 애비의 원수를 잊었느냐 ?
라고 외치게 하였다.

그렇게 2年餘,
부차는 오직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모든 國政을
越나라 侵攻準備에 集重하며 절치부심 하였다.

B.C.494년, 吳王 부차 2年
드디어 吳나라 10萬 大軍이 越나라를 侵攻하였고,
회계산전투에서 항복한 越王 구천을 포로로 잡아 凱旋하였다.

捕虜로 끌려온 越王 구천은
왕릉직이로서 石室에서 기거하며 풀을 베고 말을 먹이는 고통스런 생활을 감내 해야 했다.

그러나 구천에게는 범려라는 名臣下가 있었다.
범려의 計略에 따라
구천은 자존심을 버리고 최대한 아첨하여 吳王의 歡心을 사서 오직 풀려날 방도를 찾기에 盡力한다.

吳王 부차가 病이 났을 때는
스스로 무릎걸음으로 기어가 부차의 변까지 맛을 보기도 하는 등,
실로 말할 수 없는 굴욕을 참아가며 計劃을 철저히 수행한 보람으로,
드디어 捕虜生活 3年만에 가까스로 석방되어
꿈에도 그리던 故國으로 돌아오게 된다.


인고의 捕虜生活에서 벗어나 어렵사리 살아 歸國한 구천은
즉시 새로운 복수를 하기 위하여 범려와 함게 構想했던 計劃을 實踐에 옮긴다.

먼저 吳王에 항복했던 치욕의 땅 회계로 遷都하고 가혹한 苦難의 歲月을 自請하면서 복수를 준비 한다.

그는 스스로를 학대하며 臥薪嘗膽 복수에 一念한다.

구천은 문종의 計策에 따라 철저한 비밀리에 軍事力을 養成하는 한편,
吳나라를 弱化시키기 위하여
절세 美人 "西施"를 바쳐 吳王을 酒色에 빠지게 하는 美人計,
名宰相 "伍子胥"를 除去하기 위한 이간계로
B.C.484年 伍子胥는 王이 내린 短劍을 받고 自決하게 만든다.

伍子胥는 自決하면서
내가 죽거든 내 두 눈을 뽑아 東門위에 걸어라.
내 기어코 越나라 軍士가 吳나라를 滅亡시키는 것을 보리라.


그러기를 무려 9年, 伍子胥가 自決한지 2年 되는 해에
越王 구천은 그간 심혈을 기울여 育成한 精銳兵 10萬 大軍을 이끌고 吳나라를 攻擊하여 부차의 항복을 받아내고,

다시 9年 뒤인 B.C.473年에 再攻擊하여
부차와 그 一族을 처형하고 吳나라의 종묘를 파괴함으로써
한때나마 中原의 强者로 군림하였던 吳나라는 中國歷史의 舞臺에서 사라지고 만다.

하여,
吳越同舟, 臥薪嘗膽이라는 고사성어를 만들어낸
두 나라의 복수전 歷史는,
吳나라가 滅亡한 時点인 B.C.473年을
春秋時代를 마감하고, 戰國時代가 열리는 起点으로 삼고 있다.
  
     -參考文軒 : 司馬遷의 史記, 列國志-

東 川 다음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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