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세력의 침투는 서방에 비해 동방이 훨씬 높았으나 리키니우스는 단지 종교문제로만 머물은 반면, 콘스탄티누스는 한 차원 넘어선 정치적인 문제로 다루어 인간의 이름으로 황제의 자리를 계승하면 암살이 자행되던 시절에 신의 이름으로 제위를 계승함으로서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게하는 <왕권신수설>의 토대를 마련하게 된다. 로마 제국의 단독 황제가 되기 위한 단계를 하나씩 착실하게 올라가고 있던 시기의 콘스탄티누스는 기독교 문제에 대해서도 하나씩 착실하게 실적을 쌓아올리는 방식을 택했다. ★ AD 324년, 마지막으로 남은 경쟁자 리키니우스를 타도하는데 성공한 콘스탄티누스는 그해부터 337년까지 13년 동안 유일한 최고 권력자로 군림하면서 지금까지 제국 서방에서 쓴 기독교 진흥책을 동방에서도 쓰게 된다. 그 제 1탄이 리키니우스 타도직후에 시작된 새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 (터키의 이스탄불)의 건설과 더불어 황제의 사유재산을 기독교회에 기증한 것이다 . 황제의 재산은 로마 제국의 제위에 올랐기 때문에 사용할 권리를 얻었을 뿐 개인이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사유재산은 아닌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신에게 기도를 드리는 곳이 교회지만 기도와는 관계없이 미사를 비롯한 종교 의식과 빈민구제 등 기능을 발휘하게 하려면 돈이 들게 되고 이것은 일반 신도들의 기부로 충당하는 것이 이상적이지만 종교적 환경을 만드는데 확고한 경제 기반을 제공하는 사유재산을 기증하였으니 더 이상적이었을 것은 분명하다. 이리하여 로마 제국은 점점 기독교 제국으로 내달리는 터전을 확고히 다져갔으니 소아시아에서 시리아,팔레스티나에 걸친 제국 동방의 기독교회가 콘스탄티누스를 12사도에 이어지는 존재로 숭배한 것도 당연하다
|
'Roma인 과 基督敎'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리우스 [17] (0) | 2009.04.20 |
---|---|
콘스탄티누스의 기증장 [16] (0) | 2009.04.20 |
밀라노 칙령 [14] (0) | 2009.04.18 |
基督敎의 神 [13] (0) | 2009.04.17 |
哲人 皇帝[12] (0) | 2009.04.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