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孫殯과 龐涓 (2)
이런 일이 있은 그 다음해인 B.C354年, 魏나라 將帥 방연이 5萬 大軍을 이끌고 趙나라를 侵攻하는 戰爭을 일으켰다.
魏의 侵攻을 받은 趙나라는 齊나라에 救援要請을 하게 되는데 齊나라에서는 卽刻 "전기"를 大將軍으로, 孫殯을 軍師로 삼아 出兵 하여 桂陵戰鬪에서 大勝을 거두고 龐涓을 격퇴한다.
뜻밖의 敗北에 당혹한 龐涓이 敵陣을 바라보니 작년에 우물에 빠져 죽었다는 孫殯의 軍師 깃발이 펄럭이지 않는가. 이에 孫殯을 두려워하는 龐涓은 敗殘兵을 수습 서둘러 回軍하고 만다. 그리고 또 歲月은 흘러 12年이 지나가 버렸다. 그동안 軍事力을 最大限 增强한 魏나라는 世子 申과 龐涓이 이끄는 10萬大軍을 앞세워 이번에는 韓나라를 攻擊하게 되었는데 역시 韓나라의 救援要請을 받은 齊나라는 孫殯을 다시 軍師로 삼아 5萬 兵力을 出動 하게 된다.
孫殯과 龐涓, 두 將帥가 숙명적인 再對決을 하게 되는 戰鬪가 유명한 馬陵戰鬪이다.
孫殯은 大軍인 龐涓의 압박에 못 견디는 척하고 後退 하게 되는데 兵士들이 밥을 지어 먹는 부뚜막 수를 점차 減小시키키면서 退却한다.
물론 이 作戰은 追擊하는 龐涓이 孫殯의 軍隊가 脫營兵이 많아 無力해지는 것으로 誤判 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孫殯의 計略에 걸려든 龐涓은 弱化된 敵을 단숨에 무찌르고 孫殯을 사로잡기 위해 하루에 100 리씩 强行軍한다. (당시 하루평균행군속도 30리/ 1일 )
龐涓의 군사가 馬陵에 이르렀을 때 소나무를 베어 만든 장애물을 보고, 적이 멀리가지 못하였다고 판단한 龐涓은 全兵力을 動員하여 장애물을 헤치고 夜間行軍을 强行하였다.
얼마 쯤 前進 하니, 껍질을 벗긴 소나무 한 그루만 덩그러이 서있는 廣場에 다달았다.
벗겨진 소나무에 글씨가 써져 있는 것 같아 龐涓이 횃불을 밝혀보니 “ 龐涓死于此樹之下: 龐涓이 이 나무 아래에서 죽다 ” 라고 孫殯이 쓴 것이었다.
龐涓이 켜든 횃불이 신호라도 되는 듯 매복해 있던 孫殯의 군사가 일제히 쏘아대는 수만개의 화살에 龐涓은 最後를 맞이하게 되었고 魏나라는 이 敗戰으로 衰退의 길을 걷게 된다.
그 後 孫殯의 行跡에 대하여 별로 알려진 바가 없으나, 1972年 산동성 임기현 은작산 일대의 고분에서 孫殯이 쓴 孫子兵法 竹簡 88券이 발굴되면서 孫武와 孫殯의 이야기가 史家들이 지어 낸 설화가 아닌 실제의 사료로서 각광을 받게 되었다.
參考文軒: 司馬遷의 史記, 列局志 中에서
東 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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