范 睢
그는 魏나라 도읍인 대량 태생으로 字를 叔이라하여 范叔 이라고도 하며, 秦나라의 天下統一基盤을 마련한 名宰相이다.
그는 魏나라 중대부인 須賈라는 사람의 집안일을 돌보는 舍人노릇을 하던 사람이었다.
허약해진 魏나라는 당시 새로운 强國으로 부상한 齊나라에 謝罪使臣으로 파견하는 주인 須賈와 동행하게된다.
使臣인 須賈는 아무 대답도 못하고 벌벌 떨고만 있을 때 그를 隨行하던 范雎가 齊讓王 앞으로 나아가
先王 때 齊나라를 친 것은, 당시 齊ㆍ魏가 協攻하여 宋나라를 滅亡시키고 그 領土를 分配하기로 한 約束을 齊나라가 어기고 同盟國을 背信한 것에 대한 應懲이었지만, 지금은 관례대로 禮를 갖추어 使臣을 보내 謝罪하는 데 트집을 잡는 것은 道理에 맞지 않은 處事라고 열변을 토하였다.
齊讓王은 범수의 勇氣와 論理精然한 주장에 감탄하여 使臣의 請을 받아들이게 된다.
使節團은 범수의 활약으로 무사히 任務를 마치고 歸國하였으나 須賈는 시기와 질투로 범수가 敵과 내통한 자로 모함하여 흉악한 형벌을 가하였다.
이러한 범수를 秦나라의 使臣 王稽라는 사람이 범상한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秦나라에 出仕하기를 勸하여 秦昭讓王에 발탁되니
그해가 秦昭讓王 39年, B.C.286년이고, 秦始皇이 天下를 統一하기 46年 前이다.
범수가 出仕할 때, 秦王에게 “現在 秦나라는 계란을 쌓아 놓은듯이 위태로우나( 危如累卵) 小臣을 쓰면 安全하다.” 라고 자신있게 말하였다 한다. 이것이 "累卵의 危機"라는 말의 기원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범수는 먼저 秦나라의 골칫거리였던 外戚과 승상 위염의 勢力을 除去하고 王權을 强化한 다음, 그가 구상한 遠交近攻이라는 對外政策에 따라 韓나라와 魏나라를 공격할 준비를 서둔다.
이러한 秦의 對外政策에 急해진 魏나라에서는 급히 須賈를 親善使節로 秦나라에 파견하지만,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 과거 그에 의하여 죽다가 살아나 강국의 승상 자리에 앉아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것 아닌가 ?
결국, 범수의 요구대로 魏나라는 범수를 욕보였던당시의 재상 "위제"의 목을 秦나라에 바치고 겨우 환란을 모면하게 된다.
그가 推進한 遠交近攻政策으로 B.C.263年,
秦나라 最高의 名將인 백기가 韓나라를 攻擊하여 9個城을 점령하고 5萬名의 敵兵을 사살하였으며, B.C.260年,
趙나라를 攻擊하여 장평 전투에서 40萬名을 포로로 잡아 모두 화형시켰으며,( 이는 東西古今을 통털어 最大의 학살임) B.C.256,
비록 실권은 없다하나 春秋戰國時代 500年 동안 天子로서 감히 아무도 넘보지 못했던 周나라를 攻擊하여 36個城을 점령하고 周王의 王號를 삭탈한뒤 周公으로 임명함으로서 天下의 主人인 天子의 身分에서 秦나라의 臣下가 되고 마는 당시로서는 상상하기도 어려운 大事件을 과감하게 完成하였다.
그는 超强大國 秦나라의 승상에까지 올라 자신의 遠交近攻政策을 推進하여 天下統一의 基盤을 다진 그의 業積을 높게 評價하고 있다.
-參考文軒 : 司馬遷의 史記, 列國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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