司馬遷의 史記

73. ■ 韓信에 대한 死後評 (73)

동천 2010. 2. 17. 15:44



■ 韓信에 대한 死後評

이렇게 죽은 韓信의 죽음을 두고 태사공 司馬遷은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世上 사람들은 간혹 韓信을 두고 이렇게 말한다.
韓信은 남보다 앞서 큰 計策을 세우고 高祖와 함께 漢中에서 일어나 三秦을 평정하였다.
이윽고 병력을 나누어
北으로 魏나라를 무찌르고
代나라를 아울렀으며
趙나라를 무너뜨리고
燕나라를 위협해 항복을 받아 냈다.
東으로 齊나라를 쳐부수어 차지하고
南쪽으로는 垓下에서 楚나라를 쳐 없앴으니 무릇 漢나라가 天下를
얻게 된 것은 그의 모두가 韓信의 功이라 할 수 있다.

괴철의 말을 듣지 않은 것과 陳땅에서 교외까지 나가 高祖를
맞이한 것을 보아도 어찌 그에게 모반할 마음이 있었다 할 수 있겠는가.
실은 楚王의 職位를 잃자 불평과 불만으로 시뜻해하다가
급기야 悖逆(패역)에 빠진 것이다.

"노관"은 高祖와 한 마을에서 자란 옛정으로 燕나라의 王노릇을 하는데,
韓信은 그저 열후로서 조정의 命이나 받들게 되었으니
어찌 高祖 또한 韓信을 저버린 것이 아니라고 하겠는가.

내가 보기에도 高祖가 속임수와 끼를 써서 韓信을
陳나라 땅에서 사로잡은 것을 저버림이라고 한다면 그런 면이 있다.
허나 비록 그러하다 해도, 韓信 또한 이를 불러들인 면이 있다.
처음에 漢나라가 楚나라와 "형양"을 사이에 두고 힘겹게 맞서고 있을 때
韓信은 齊나라를 쳐 없애고도 돌아와 그 일을 아뢰지 않고
거기에 눌러앉아 스스로 王位에 올랐다.

그 뒤 漢나라 軍士가 楚나라 軍士를 추격해 固陵까지 갔을 때도 高祖는
韓信과 함께 楚나라 군사를 치기 바랐으나 韓信은 끝내 그리로 오지 않았다.
이때에 이르러 高祖는 이미 韓信의 마음을 알아차렸지만 그를
어찌 못한 것은 그럴 힘이 모자람을 헤아렸기 때문일 뿐이다.

그런데 天下가 이미 평정된 후 어찌 高祖가 다시 韓信에 의지할 수 있겠는가.
기회를 틈타서 利得을 쫓는 것은 저잣거리의 잡된 뜻이요 세운 功에 응당하게 갚고 恩德에 보답하는 것은 배움 깊고 덕망 높은 君子의 마음이다.

韓信은 시정 잡배의 마음으로 자기 잇속을 차리면서
남에게는 君子의 마음을 바라고 있었으니
또한 어찌 어렵지 않겠는가.

이 때문에 司馬遷은 말 하였다.
만약 韓信이 道理를 배우고 겸양하여 자기의 功勞를 내세우지 않고
자기의 재주를 자랑하지 않았다면 漢나라에 세운 공훈이 周나라의 周公이나
召公, 太公과 견줄 수도 있었을 것이며 後世에까지 나라의 祭享(제향)을
받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되려고 애쓰지 않고 天下가 이미 安定된 뒤에
반역을 꾀하였으니 宗族이 모두 죽음을 당한 것 또한 마땅하지 않은가.

參考文軒: 司馬遷의 史記, 列局志 中에서

東 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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