古 史

79.最後의 好俠 郭解

동천 2010. 10. 29. 12:08

最後의 好俠 郭解

武陵,

이곳은 漢武帝의 외가집이 있는, 즉 어머니 왕태후의 고향으로서,
風水地理學上으로 龍과 鳳凰이 깃들은 곳이라하여 그의 陵墓를 이곳에 建設하기로 하고,
요즘 말로 말하면 "武陵" 땅에 新都市를 建設, 많은 豪族들에게 이곳에 移舍하도록 令을 내렸다.

中國 歷史上 불후의 名作 "史記"를 쓴 司馬遷의 나이 19歲 되던 해,
그의 아버지는 앞으로 "武陵"의 前途가 양양하여 司馬遷의 成長에 도움이 되리라 判斷하고 이곳으로 移舍하였다.

司馬遷은 孔子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하여 首都로 가는 길인데,
문득 길 앞쪽에 사람들이 새까맣게 모여 길을 막고 있어 비집고 들어가 보니,
건달 "李倉"이 과일 行商인 "劉小河"의 멱살을 잡고 소란을 피우고 있는 것이었다.
몸집이 좋은 李倉이 容貌는 준수하나 삐쩍 마른 劉小河의 멱살을 잡고 있는 꼴이 마치 호랑이에게 물려있는 닭 같았다.


건달 李倉이 행패를 부리는 까닭은
그가 劉小河의 판매대 과일을 말도 없이 하나 집어 우지직 깨물었는데,
하필이면 붉고 보기 좋던 과일이 벌레 먹은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여,
李倉이 적반하장격으로 1,000 원을 내던지, 1,000 대를 맛던지 하라는 것이었고,
劉小河는 다음부터는 절대로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노라고 무릎을 꿇고 빌겠으니 용서해 달라고 애원하고 있었다.

바로 그때
집신에 평복차림의 한 사나이가 群衆을 헤집고 그들 앞에 나타나 나지막하지만 힘있는 목소리로"멈춰!"라고 하자,
"야! 야! 郭 大俠이다!" 라는 소리가 群衆속에서 흘러 나왔고,
周衛는 가벼운 술렁임이 일었다,

그러자 건달 李倉은 자기 키보다 한자나 작은 郭大俠을 보더니 마치 고양이 앞의 쥐꼴이 되어 달아 났다.

유협열전에 출현하는 전중, 왕명, 극맹에 이어 유협열전의 대미를 장식하는 "郭解"
그에게는 수 많은 逸話가 있지만, 하나만 소개하기로 하겠다.


그 때 그 시절에는
하도 인심이 삭막하여 낙양 사람들 가운데 서로 원수로 지내는 사람이 많았는데,
고을 내의 어진이나 豪傑들이 10 餘名이나 중간에 나서서 이를 중재 하려고 하였지만
그들은 끝내 말 을 듣지 않아 "郭解"가 해결사로 나서게 되니 그들은 선뜻 그의 말대로 應하였다.

그러자 "郭解"가 그 원수진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내가 들으니 낙양의 강호 제현들이 중재에 많이 나섰지만,노형들이 받아 들이지 않았다고 들었소. 지금 다행이 저가 하는 말을 들어주기는 했소만, 다른 지역 사람인 제가 어찌 이 지역에 계신 훌륭한 분들의 권위를 빼았을 수 있겠소."라고 말하고는 그날 밤으로 남의 눈에 뜨이지 않게 그 곳을 떠나며 이런 말을 남겼다.

"잠시동안 그전 처럼 행동하시오. 그리고 제가 사라진 다음 낙양에 있는 호걸을 중재자로 넣어 그 말에 따라 화해 한 것 같이 하시오."


이러한 "곽해"를 본 사마천은 황실의 들뜨고 흥청거리는 분위기와는 전혀 딴판으로 백성들은 수많은 전쟁과 전제통치의 고충을 겪고도 억울함을 호소할 길 없어 한탄과 통곡이 천하에 넘쳐 흐르던 시대에 그가 걷고 있는 행로에 큰 감명과 힘을 더하였다고 쓰고 있 다
  
     -參考文軒 : 司馬遷의 史記, 列國志-

東 川 다음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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