太平會盟圖
■ 12. 義妓 論介
由緖깊은 晋州城에 빼어놓을 수 없는 또 한 사람, 論介가 있다.
晋州 8景 가운데 제1 景으로 꼽히는 촉석루, 그 아래 어른 5~6명 앉을 수 있는 크기의 둥그런 바위, 義巖이 있는데...... 한 女人이 1,593년 여름 어느날, 다섯 손가락에 가락지를 끼고 倭將 [게야무라]와 함께 投身한다. 그 女人의 이름이 論介, 19세의 꽃다운 나이였다.
그야말로 나라를 위해 義로운 죽음을 택한 그 女人도 賤한 妓生이라 하여 功을 認定하지 않았다. 壬辰倭亂이 끝나고 전쟁때 功을 세운 사람들의 行蹟을 기록한 [東國新續三綱行實圖]라는 책에 그녀의 이름이 없다. 이유는 儒林들이 身分이 賤한 妓女라는 것이다.
晋州 사람들은 그녀를 기리는 [義妓祠]라는 祠堂을 세우고 朝廷에 수차례 表彰 歎願을 한 결과,그녀가 죽은지 147년이 지난 1,721년 에야 마침내 英祖 임금의 결재를 받고 그 녀의 殉國 사실이 國家에서 公式으로 認定하게 된다.
身分이 妓生이면 어떻고 兩班이면 어떠하며 賤民이면 어떠한가. 그것이 國家의 忠誠과 무슨 의미가 다른 것인가.
그는 壬辰倭亂 당시 全羅南道 화순의 義兵將이었던 충의공 최경희 將軍이 사랑한 女人으로, 사랑했던 사람을 죽인데 대한 復讐였을가? 6만명의 晋州市民을 沒殺시킨 日本軍에 대한 復讐였을가?
東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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