丙子胡亂

▣人間市場

동천 2016. 9. 19. 06:50

▣人間市場


■ 1637년 4월, 용골대는 소현세자를 통하여
"청군이 조선으로부터 완전히 철수한 뒤부터 심양에서 시작한다"
贖還方針을 통보했고, 소현세자는 이를 4월13일 본국에 보고했다.

이는 전란으로 혈육의 생사를 알지못해
고통받고 있던 수많은 사람들에게는 [희망의 끈]을 품게 되었다.
살아 있기만 하면 속환해 오는 데 드는 몸값은 문제가 될 수 없었다.
헤어진 혈육들이 생존해 있기를, 그리고 그들을
속환해 오기를 기대하는 것은 離散家族들의 悲願이었다.
그러나 그 비원은 누구나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었고 높은
관직에 있거나 많은 재물을 갖고 있는 사람이 아니면 어려웠다.
바로 그기에 피로인 문제를 둘러싼 또다른 비극이 자리잡고 있었다.

피로인들의 贖還價(몸값)는 銀으로 계산했는데
남자는 한 사람당 銀 5냥,
여자는 3냥이었고
아무리 높아도 10냥을 넘지 않았다.
하지만 공식적인 속환이 시작되면서 상황은 돌변했다.

■ 1637년 4월,
좌의정 李聖求(비석 사진)가
謝恩使로 심양에 가게 된다.

그가 淸에 입국했을 때
5월 15일 이후 심양에서
[인간시장]이 열렸다.

謝恩使 李聖求는
수소문하여 자신의
아들도 피로인으로
심양에 잡혀있는 것을
확인하고 銀1,500냥을 주고 속환했다.

많은 조선인들이 혈육을 데려가려는 소망을 품고
[인간시장]에 모여들었는데 이성구의 행위는 인신매매로
한밑천 잡으려는 청인들의 탐욕과 일부 조선 고관들의 조바심과
무책임한 행태 때문에 속환가를 폭등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다음에 계속됩니다
東 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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