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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4. 獨立軍 創設

義兵抗爭史 ■ 44. 獨立軍 創設 나라가 없어지던 날 1910년 8월 29일, 帝國主義 日本은 景福宮에 일장기를 걸어 놓고 국권 찬탈을 철저히 상징했다 이토록 뼈아픈 민족의 苦難史를 막기 위해 자신과 가족을 버리며 오직 쓸어져 가는 大韓帝國을 위해 몸 바친 그 이름을 義兵이라 불렀고 실로 자랑스럽고 존경스러운 이름이다. 이들 의병을 [乙巳勒約]에 의거 [韓日合邦]된 시점을 기준으로 大韓帝國이 멸망하기 이전까지 일제 침략에 항전한 것을 [義兵戰爭], 大韓帝國이 멸망한 후에 일제와 싸운 것을 [獨立戰爭]으로 구분한다. 국권 상실을 전후해 간도와 연해주 지방으로 옮겨온 의병 출신의 애국지사와 교민들은 각기 독립운동단체를 결성하고 독립군 기지를 설치하여 장차 독립전쟁에 대비한 독립군을 양성하고 있었다. 국내에서..

義兵抗爭史 2020.05.03

■ 37. [李康秊년]의 百潭寺戰鬪

義兵抗爭史 ■ 37. [李康秊년]의 百潭寺戰鬪 [李康秊]은 문경시 가은읍 상괴리 출신으로 1879년 무과에 급제했으나 일제 치하의 관직을 버리고 귀향, 1896년 1월, 문경에서 처음으로 의진을 결성, 충북 제천의 호좌의 진에 합류해 유격장으로 여러 전투에 참여하다가 동년 7월에 의병을 일단 해산하고 10년간 [유인석] 밑에서 儒學 공부에 전념하다가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고, 1907년 고종의 강제 퇴위와 군대 해산이 강행되자, [이강년]은 1907년 8월에 제천에서 다시 의병을 일으켰다. 하여, 강원. 충청. 경북 일대 八域同志에게 남긴 告訣文(이별을 고하는 글)에서 [싸움 30여 회에 죽여서 얻은 敵將의 머리만도 100여 개]라고 한 그대로 역전의 노장으로 그가 남긴 의병 투쟁사는 실로 ..

義兵抗爭史 2020.04.27

■ 36. 聯合義兵의 서울 進攻作戰

義兵抗爭史 ■ 36. 聯合義兵의 서울 進攻作戰 항일 의병 투쟁이 새로운 기세로 고조되는 가운데 의병장들에게 부과된 새로운 현실적 과제는 압도적인 왜군과 싸우기 위해서는 연합전선의 결성이었다. 국권회복을 궁극적 목표로 투쟁하고 있는 의병들로서는 서울 탈환의 꿈은 가슴에 사라지지 않는 하나의 커다란 이상이었다. 하여, [이인영] 의병장은 지방에서 제 아무리 日軍과 싸운다 해도 日軍이 서울을 장악하고 있는 한 국권회복은 불가능하다고 판단, 전국의 산발적인 의병진을 대규모 연합의병부대로 편성하여 통일된 지휘 아래 서울로 진격하여 일거에 일군을 패퇴시키려는 계획을 수립하였다. 1907년 11월 각 의병대장에게 경기도 양주로 집결할 것을 촉구하였고 이어 ‘13도 창의 대진 소원 수부’를 설치하고 의병장들의 만장일치..

義兵抗爭史 2020.04.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