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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4. 學徒義勇軍의 浦項戰鬪

義兵抗爭史 ■ 54. 學徒義勇軍의 浦項戰鬪 북괴군은 낙동강 교두보를 돌파하기 위해 2개 사단을 포항 방면에 집중시켜 대공세를 시도하였다. 이 무렵, 大邱에서 결성됐던 [대한 학도의용대] 87명은 [金錫源] 將軍이 지휘하는 安東 주둔 首都師團에 들어가 안동 철수작전에 처음으로 전투에 참전한 뒤, 16명은 수도사단에 정식 입대하고 나머지 71명은 귀가해도 좋다는 사단장의 명령을 받았지만 학도들은 [김석원] 장군을 따라가 3사단이 위치한 포항으로 이동, 당시 포항여중에 위치한 3사단 후방지휘소에서 임시 대기하게 되었다. 사단 후방 사령부에는 대부분의 병력을 전방 전투에 투입하여 연락 장교와 군악대원 20여 명만 잔류하고 있었다. 8월 11일 새벽 3시경, 북괴군은 국군 제3사단을 포항 북방에 고립시키고 인민군..

義兵抗爭史 2020.05.10

■ 54. 學徒義勇軍

義兵抗爭史 ■ 54. 學徒義勇軍 ▶ 따라서 모병 가능한 지역은 경남북 일대뿐이어서 정부는 경남북 일대 곳곳을 다니며 18~30세까지는 눈에 보이는 대로 강제 입대시켰고. 전황의 급해지자 배속 장교들이 전황을 알리면서 『조국을 구하기 위해 학생들이 전선으로 나가 싸워야 하지 않겠느냐』는 學徒兵 지원 권유에 감동하여 대구나 부산 등 대도시에 피란 온 학생과 현지 학생들의 지원도 줄을 이었다. 이렇게 하여 모집된 학도병은 "훈련이라곤 3일간 기초 군사 훈련을 받은 후, 수성구에 있는 대구농림학교로 이동해 단발 장전식인 9·9식 일제 소총을 지급받았고 다시 3일 후 사단에 배속, 곧바로 戰線인 안동에 투입되어 M1 소총이 지급되었다. 훈련받을 때와는 다른 총이라 탄약을 장전할 때 많은 학생들이 손을 다쳤다. ▶..

카테고리 없음 2020.05.08

■ 53. 學徒 義勇軍 募集 背景

義兵抗爭史 ■ 53. 學徒義勇軍 募集 背景 ▶ 전황 북괴군은 천안까지 제4사단을 후속하던 제6사단장 [방호산] 소장은 방어에 개방되어 있는 호남지방으로 우회기동하여 질풍 같은 기세로 ☞7월 19일, 금강을 넘어 익산으로 진출, ☞7월 20일, 전주, ☞7월 23일, 광주, ☞7월 25일, 순천 동쪽까지 진격, 140km 거리에 있는 부산 공격을 위해 숨을 고르고 있었다. 한편, 미 제8군 사령관 [워커] 장군은 ☞7월 20일, 미 제24사단이 대전에서 궤멸되자, ☞7월 18일에 영일만에 상륙한 미 제1기갑사단 주력을 영동 정면에 전개하여 경부 도로 전면을 방어토록 하고, ☞ 미 제24사단으로 부산 서측방의 거창-안의-진주-사천을, ☞ 미 제25사단으로 상주 정면을 ☞ 한국군과의 작전지경선을 상주 북쪽에서..

義兵抗爭史 2020.05.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