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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7. 北進 砲兵隊

義兵抗爭史 ■ 57. 北進 砲兵隊 1950년 10월 15일, 서울 용산중학교 교정에서 341명 학도들이 [북진 포병대]를 조직하였다. 이들 대부분은 머리를 빡빡 깎은 15~16세 되는 어린 중학생들이 많았고 그중에는 대학생도 끼어 있었다. [맥아더] 장군의 인천 상륙작전으로 패주 하는 적을 추격하던 국군은 어느 정도의 포를 공급받았지만 포병이 절대적으로 부족하였다. 그러나 부족한 포병은 일정한 지식과 기능을 필요로 했기 때문에 일반병 중에서 아무나 차출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하여, 7사단 포병단 제18포병대대 학도의 용 포병 모집 공고를 하였는 바, 적 치하에서 3개월간 숨을 죽이고 울분을 참아왔던 학도들은 돌파구를 찾은 듯 서울시내 26개 중학교에서 지원자가 몰려들어 시험을 거쳐 선발된 인원은 용산中..

義兵抗爭史 2020.06.11

■ 56. 長沙洞 上陸作戰

義兵抗爭史 ■ 56. 長沙洞 上陸作戰 8월 하순, 대구에서 학도 의용대에 지원하여 密陽에서 창설된 유격대에 편입된 학도병 697명이 9월 8일, 육본 전투명령에 의거 부산으로 내려왔다. 이들 학도는 육군본부 독립 유격대 1대대 요원들로서 대대장 [李明欽] 大尉의 이름을 따 일명 [明 部隊]라 불렀던 학도 특공대는 9월 10일, 경북 영덕군 남정면 長沙里上陸命令이 내려졌다. 이 작전은 연합군의 총반격 돌파구를 9월 15일 인천 상륙작전을 위한 양동작전으로 마련된 것으로 이미 포항 근처에 布陣하고 있던 북괴 제5사단과 제12사단의 배후인 장사동에 상륙한다는 것은 엄청난 모험이자 막중한 임무였으므로 육군본부 작전국 담당관들도 학도 특공대들이 살아 돌아 오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9월 13일, 영국 구축함 1..

義兵抗爭史 2020.05.23

■ 55. 在日學徒義勇軍

義兵抗爭史 ■ 55. 在日學徒義勇軍 1950년 6월 25 일 ,북괴의 불법 남침 소식이 알려지자 학생을 중심으로 한 재일동포 청년들이 조국방위를 위해 민단중앙사무소에 모여 의용군지원병 모집을 결의하고 6월 29일, 각지 민단본부에 의용군접수소가 설치되었다. 민단중앙은 주일대표부를 통해 재일동포 청년의 의용병 파견을 협의하였으나 당초 한국정부는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였다. 그러나 인천상륙작전에 통역과 길안내 요원의 필요에 따른 윌로비(Charles A, Willoughby) 소장의 요청으로, 642명이 선발되어 미8군에 편입, 참전하게 된다. 이들은 사격·제식훈련 등 2주간의 단기속성 군사훈련을 마친 재일의용병은 1진 76명이 1950년 9월 중순 인천상륙작전에 투입된 이래 모두 여섯 차례에 걸쳐 한국에 들..

義兵抗爭史 2020.05.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