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1963

■13.壬辰亂 義兵抗爭의 義意

義兵抗爭史 ■13.壬辰亂 義兵抗爭의 義意 壬辰倭亂時 의병들의 대소 전투는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으며 그중 활약상이 컸던 1592년부터 1593년 간의 대표적인 몇몇 전투를 실었으며 그 외에도 [김면]-[정인홍]-[손인갑]의 부계 전투, [양대박]의 운암 전투, [손인갑]의 초계현 마진 전투, [김면]-[김준민]의 우척현 부근 전투, [곽재우]-[윤탁]-[주몽룡]의 영산 전투, [유종게]의 소천 전투, [이정암]의 연안성 전투, [임 중량]-[윤붕]의 중화 전투 등 의병항쟁이 많으나 지면 관계로 모두 싣지 못하여 참으로 유감스럽기만 하다. 조선 왕조는 사화와 당쟁으로 국력이 약화되고 국방은 소홀한 틈에 왜군의 침략하자 순식간에 수도 한양이 함락되고 파죽지세로 평안도, 함경도로 북상하였다. 조선의..

義兵抗爭史 2020.04.17

■12-2.[金千鎰]의 第二次 晋州城 戰鬪

義兵抗爭史 ■12-2. [金千鎰]의 第二次 晋州城 戰鬪 ☞6월 19일, 9만 왜군이 의령에서 진주성으로 진출, ☞6월 20일, 적의 선봉대가 이미 진주성 동쪽 마현봉 위에 나타나 검광을 번쩍였다 ☞6월 21일, 적의 대군이 성을 3중 포위했으나 총포는 한 발도 쏘지 않았으므로 성중에는 조금도 동요하는 기색이 없으니 적은 마침내 물러갔다 ☞6월 22일 10시경부터 제1파,제2파가 연속으로 동문 성벽으로 진입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자 한밤중에 제3파가 공격해 오자 철환고 불화살을 쏘아 격퇴했다 ☞6월 23일, 주간에 왜군은 조총을 난사하면서 성 주변 호수에 흙,돌 풀더미를 메꾸고 성벽 초석을 파내면서 3회에 걸쳐공격해 왔으나 아군의 분전으로 격퇴하였다 ☞6월24일, 아군이 완강하게 저항을 계속하자 5~6천명을..

義兵抗爭史 2020.04.16

■12-1. [金千鎰]의 第二次 晋州城 戰鬪

義兵抗爭史 ■12-1. [金千鎰]의 第二次 晋州城 戰鬪 왜군은 평양성이 피탈된 후 서울로 총퇴각 하였고, 의병들에 의해 各地城 間 교통이 차단되면서 식량난으로 위기감이 고조된다. 벽제관 전투에서 반전이 일어나나 했던 전황은 행주 대첩으로 인하여 주도권이 조선-명 연합군측으로 기울어 심각한 손실을 더는 견디지 못한 왜군은 결국 개전 1년만인 1593년 3월에 부산포로 총퇴각하게 되고, 퇴각후 왜군은 6월 초부터 慶尙右道 및 全羅道 공략과 동시 화전양면책을 시도한다. 이에 따라 6월15일에는 함안을, 6월 16일에는 班城을, 6월 18일에는 낙동강을 건너 의령으로 진격한다. 한편,조선군은 全羅兵使 [宣居怡]와 忠淸 조방장 [洪秀男] 等이 함안을 방어하고, 성주목사가 된 郭再祐 等이 鼎岩津을, 진주목사 [徐禮..

義兵抗爭史 2020.04.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