義兵抗爭史 54

■ 21-2.[柳麟錫]의 忠州城戰鬪와 西北移動

義兵抗爭史 ■ 21-2. [柳麟錫]의 忠州城戰鬪와 西北移動 충주는 중부권의 20여 개 고을을 관할하는 전략적 요충지라는 지리적 특징도 있었지만 당시 충주 관찰사 [김규식]은 친일개화파 [박영효]의 지시로 단발령을 비롯한 개화 정책을 주도해 나가고 있었기 때문에 [柳麟錫] 의병대장은 충주성을 1목표로 공격, 이를 장악 함으로써 서울로 나가는 거점을 확보하여 청일전쟁 때 부산에서 서울까지 설치하였던 일본군의 통신선을 차단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 호좌 의병은 2월 16일 출진하여 그날 院西에서 1 泊 하고 ☞2월 17일,북한강 상류 북창 나루를 건너 곧바로 忠州府를 공격하였다. 관군과 왜군은 문루에 올라 최후의 저항을 하였지만 치열한 공방전 끝에 충주성을 함락하였다. 하여, 충주관찰사 [김규식]은 관..

義兵抗爭史 2020.04.19

■ 21-1.[柳麟錫]의 忠州城戰鬪와 西北移動

義兵抗爭史 ■ 21-1. [柳麟錫]의 忠州城戰鬪와 西北移動 [柳麟錫]은 54세가 되던 1896년 2월 3일, 영월성 문루에 ‘복수보형기’ 의 깃발을 내걸고 湖左倡義陣을 結成한다. 그는 의병장 취임 즉시 다음과 같이 지휘부를 편성하였다. 軍師 中軍將 前軍將 後軍將 先鋒將 左軍將 右軍將 參謀 徐相烈 李春永 安承禹 申芝秀 金白善 元奎常 安成海 朴胄주淳 의병들은 전투능력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포수와 다양한 평민들 3,500여명 [보부상, 지방병, 승려, 농민]으로 편성되었으나 총을 가진 자는 400여 명에 불과하였다. 호좌 의병의 조직상 특징은 ☞1차적으로 고종 세력과 지방 세력의 연합이며, ☞2차적으로 양반 유생과 평민들의 연합이었다. 지휘부는 중앙 고관들의 인척이나 수하들로 구성된 고종 세력 및 강렬한 ..

義兵抗爭史 2020.04.19

■ 20.京畿義兵의 南漢山城戰鬪

義兵抗爭史 ■ 20.京畿義兵의 南漢山城戰鬪 南漢山城 戰鬪는 [利川首倡義所]가 南漢山城에 입성한 뒤 양근 의병진과 연합하여 치른 큰 전투였다. [이천수 창의 소]가 남한산성에 입성한 때는 1896년 2월 28일이고, 입성 계기는 남한산성을 점령하고 있던 [심진원]의 요청에 의해서였다. [이천수 창의 소]가 입성한 뒤 곧 양근의 [李錫容] 의병진도 합세해 세 의병진의 연합 의병진이 구성되었다. 당시 연합 의병진의 병력 규모는 약 1,000여 명의 관포수를 포함해 1,600여 명에 달했고, 남한산성에는 군수물자가 ‘산같이’ 쌓여 있었다. 또한, 남한산성은 천혜의 요지였기 때문에 연합 의병진은 여러 면에서 강력한 의병부대의 조건을 갖추었다. 남한산성 연합의병진은 서울 進攻戰을 3단계로 계획되었다. ☞1단계는 수..

義兵抗爭史 2020.04.19

■ 19.[閔承天]의 백현전투

義兵抗爭史 ■ 19. [閔承天]의 백현 전투 [閔承天]은 의병 300여 명을 이끌고 이천으로 내려와 火砲軍都領將 [方春植]과 협력하여 남한산성의 別牌陣軍官 金順三과 함께 모집한 義砲軍 700여 명을 규합, 총 1,000여 명으로 利川을 거점으로 작전계획을 세웠다. 1896년 1월 17일, 일본군 수비대 180여 명이 이천 의병을 진압하려 한다는 급보가 전해졌다. 倡義隊將 [閔承天]은 신속하게 軍指揮 [金河洛]. 先鋒將[[金泰元]. 佐軍將 [金貴性]. 右軍將 [申龍熙]. 中軍將 [具然英]. 後軍將 [朴準英]. 遊擊將 [金敬誠]. 突擊將 [沈鍾萬]으로 편성, 1,000여 명의 병력을 3 분하여 ☞1개 부대는 백현 아래 골짜기에, ☞1개 부대는 백현 상봉에 매복시키고, ☞또 다른 한 부대는 백현 아래 산에 매..

義兵抗爭史 2020.04.19

■18. 第一段階 乙未義兵 抗爭

義兵抗爭史 ■ 18. 韓末 義兵 總說 먼저 1단계 의병은 1894년 갑오농민전쟁을 빌미로 침입한 일본군이 그해 6월 경복궁의 국왕을 호위하던 군대를 무장해제하는 등 횡포를 자행한 사건이 일어나자, 慶尙道 安東과 平安道 祥元에서 의병이 봉기했지만 크게 발전하지 못하다가 경복궁에 난입하여 明聖王后를 학살한 일제가 친일내각을 수립하고, 그 친일내각이 그해 11월 15일 단발령을 발포하자 의병이 전국에서 일시에 일어났다. 이때 의병봉기를 주도한 사람은 주로 위정척사사상을 가진 유생들이었다고 갑오농민전쟁으로 고양된 반일의식이 민족사회에 팽배해 있던 때였으므로 농민을 비롯한 일반 대중의 호응을 받아 전국적으로 의병전쟁을 전개할 수 있었다. 1896년 2월에 이르러 친일내각이 무너지고 이어 단발령의 취소와 함께 의병..

義兵抗爭史 2020.04.18

■ 17.韓末 義兵抗爭

義兵抗爭史 ■ 17.韓末 義兵抗爭 한말 의병운동은 주권국가로서의 민족 자주성을 회복하기 위한 항일 투쟁으로써 1895년 明成皇后 閔氏가 일본인에게 살해된 乙未事變 직후부터 시작, 한. 일 합병 이후 1914년에 이르기까지 3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 第一段階[1895.10~1896.5]는 閔妃 弑害事件과 斷髮令 직후에 일어난 乙未義兵 ☞ 第二段階[1905.4~1907.7]는 乙巳條約 전후에 再起 항쟁한 丙午義兵 ☞ 第三段階[1907.8~1914]는 高宗 강제 퇴위와 군대 해산을 계기로 전면 항일전으로 까지 확대했던 丁未義兵이다. 표# 1,000명 이상의 의병집단 구분 1895 1896 1905 1906 1907 1908 1909 1910 계 경상도 11 4 9 3 1 1 29 전라도 1 5 10 7..

義兵抗爭史 2020.04.18

■ 16.丙子胡亂時 義兵抗爭

義兵抗爭史 ■ 16.丙子胡亂時 義兵抗爭 丙子胡亂 때의 義兵 活動도 정묘호란 때와 같이 湖南地方이 가장 활발했다. 仁祖가 南漢山城에 包圍되어 나라의 運命이 危機에 直面하게 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玉果縣監 [李興浡발]. 大同察訪 [李起浡발]. 淳昌縣監 [崔薀온]. 前翰林 [梁曼容]. 前察訪 [柳집] 等은 의병을 규합하고 군량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12월 19일, 仁祖의 敎書가 전해지자 의병 모집에 더욱 박차를 가하여 募義廳을 설치하고 道內에 檄文을 전하는 한편 道에는 募義都有司를, 各邑에 募義有司를 두었는데...... [曺守城]. [曺엽] 等은 和順에서, [柳玶]은 光州에서, [金선]. [羅海鳳] 等은 羅州에서 起義하여 1월 20일, 여산에 집결한 호남 의병들은 大司諫으로 있던 [鄭弘溟명]이 召募使로 公州..

義兵抗爭史 2020.04.18

■15. [鄭鳳壽]의 龍骨山城 戰鬪

義兵抗爭史 ■15. [鄭鳳壽]의 龍骨山城 戰鬪 후금군은 1627년 3월 3일, 강화가 성립되었음에도 불구하고 明將 [모문용]을 체포한 다음 철군한다는 구실로 평양지역에 주둔, 군사들이 사방에서 약탈과 살육을 자행했다. 이같은 후금군의 만행에 관서지방 의병들은 자위의 전투를 할 수 밖에 없었고 조정에서도 의병활동을 은근히 지지하니 곳곳에서 전투가 계속되었고 그중 가장 치열했던 것이 龍骨山城戰鬪이다. 龍骨山城은 의주와 철산 중간지점에 위치한 높이 477m의 지형이 험준한 천연요새이었다. 당시 이 산성에는 鐵山,靈山,義州 等地의 피난민이 모여 있었는데 그들은 前 청산-영산의 현감을 역임한 바 있는 [鄭鳳壽]를 의병장으로 추대했다. 추대된 [鄭鳳壽]는 4천여명의 의병을 모집하고 산성 출신 [金宗敏]을 中軍으로,..

義兵抗爭史 2020.04.17

□14-2. 丁卯胡亂時 湖南.湖西地方 義兵抗爭

義兵抗爭史 □14-2. 丁卯胡亂時 湖南.湖西地方 義兵抗爭 앞서 와 같은 亂中에 各地에서 義兵이 蜂起하여 後金軍과 치열한 전투를 전개하여 비록 불리한 戰局을 好轉시키지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하였지만 강화 성립 후까지도 계속되었다. 특기할 의병 활동은 1627년 1월 19일, 兩湖號召使 [호남, 호서지방 병력 모집관]으로 임명된 前行護軍 [金長生]을 중심으로 의병이 조직되었다. 80세 高齡인 그는 號召使 諭旨와 印信을 받자 불편한 몸을 이끌고 各地에 檄文을 보내 의병 모집에 나선다. 하여, [金長生]은 前府使 [宋興周]를 副使로, 前持平 [尹전]을 從事官으로 삼고 회덕, 광주, 무창, 고창, 태인, 전주, 남원, 나주, 김제, 영광, 고산, 장성, 부안, 보령, 연산 등 各邑에 모집원을 두어 의병을 모으는 한..

義兵抗爭史 2020.04.17

■ 관서지방의병 활동

義兵抗爭史 ■14-1. 정묘호란 시 關西地方 義兵抗爭 인조반정 후 집권한 서인 정권은 친명배금 정책을 내세웠는데... 후금은 명나라를 정벌하기 앞서 조선을 정벌함으로써 후환을 없이하고 조선과의 通交로 무역상의 이득을 취함으로써 자국의 부족한 물자를 보충하려 하였다. 하여, 누르하치의 뒤를 이은 태종은 1627년 1월 13일, 그의 從兄 [阿敏]을 司令官으로 삼아 3만 명의 병력으로 조선을 침공하게 했다. 한편, 조선은 임진왜란의 상흔이 채 가시지도 않은 상태인 데다 인조반정 세력은 정권 안정을 위한 都城防衛와 西北邊防衛의 강화가 중요 현안이었다. 하여, [張晩]을 都元帥로 삼아 평양에 본영을 설치케 하고 [李适]을 平安兵使 兼 副元帥로 삼아 寧邊에 駐在하면서 西北邊을 방어토록 하였다. 그런데 仁祖 2년 ..

義兵抗爭史 2020.04.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