義兵抗爭史 54

■ 52. 韓國戰爭과 學徒義勇軍

*48. 靑山里 戰鬪 背景 : 생략 *49. [金佐鎭]의 靑山里 戰鬪 : 생략 *50. 光復軍 創設 : 생략 *51. 光復軍 活動 ; 생략 義兵抗爭史 ■ 52. 韓國戰爭과 學徒義勇軍 1950년 6월 26일 11:00시경 각급학교는 등교한 학생들을 연병장에 집합시켜 북괴 남침을 알리고 교령을 발표하자 서울 시내 각 중학교부터 대학 교정에서는 북괴 남침을 규탄하고 괴뢰 도당을 타도하자는 궐기대회가 열렸고 마침내 학도결사대원으로 지원하고 나서게 된다. 하여, 풍전등화 같았던 조국을 구하기 위해 서슴없이 전쟁터에 뛰어들었던 학도의용군, 그들의 나이는 15세에서 20대 초반까지의 학생 신분의 어린 청년들이 교복과 교모를 그대로 착용한 채 총을 들었다. 그들은 개별적으로 수십 명씩 부대를 찾아와 싸우게 해달라고 간..

義兵抗爭史 2020.05.08

■ 46. [洪範圖]의 鳳梧洞戰鬪

義兵抗爭史 ■ 46. [洪範圖]의 鳳梧洞戰鬪 1920년 6월 4일 새벽, [朴承吉]이 지휘하는 독립군 소대 30여 명이 두만강을 건너 함경북도 鐘城 북방 5里 지점의 江陽洞으로 진입, 일본군 헌병 순찰 소를 격파한 뒤, 날이 저물무렵 두만강을 건너 귀환하였다. 이 패배를 설욕하고자 일제는 南陽守備隊 소속 1개 중대와 헌병경찰중대로 독립군을 추격케 하였으나 三屯子에 이르러 독립군부대를 발견하지 못하자 무고한 양민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러 독립군이 반격하여 전멸시켰는데 이것이 鳳梧洞 戰鬪의 緖戰인 三屯子戰鬪이다. 鳳梧洞은 4면이 야산으로 둘러 싸여 마치 삿갓을 뒤집어 놓은 것과 같은 지형의 천연 요새지였고, 입구에서 25里에 걸쳐 하동, 중동, 상동 마을이 30~60호씩 몰려 살던 곳다. 日帝는 三屯子戰鬪 ..

義兵抗爭史 2020.05.04

■ 45. 獨立軍 統合

義兵抗爭史 ■ 45. 獨立軍 統合 1920년 봄이 되자 [洪範圖]의 대한독립군은 대규모 국내 진입 계획을 수립하고 군사력 집중을 위해 분산된 독립군단의 통합작업에 착수, 1차적으로 [大韓國民會의 國民軍]과 [大韓獨立軍]을 통합했다. 이어서 3.1 운동 이후 [安武]가 지휘하는 간도지방에서 가장 세력이 강한 [大韓國民會의 國民軍]을 [大韓獨立軍]과 통합하였다. ☞ 통합된 군단의 행정과 재정은 국민회가 관장하며, ☞ 軍務는 [大韓獨立軍]을 [洪範圖]가, ☞ [國民軍]을 [安武]가 담당, 지휘하도록 하고, ☞ 軍事作戰을 전개할 때에는 [洪範圖]가 2개 군단을 [征日第一軍司令官]이라는 이름으로 통수케 하였다. 이어 [征日第一軍]은 [崔振東]이 이끄는 [軍務都督府]와도 통합시켰다. 결국 [洪範圖]의 독립군 통합 ..

義兵抗爭史 2020.05.04

■ 44. 獨立軍 創設

義兵抗爭史 ■ 44. 獨立軍 創設 나라가 없어지던 날 1910년 8월 29일, 帝國主義 日本은 景福宮에 일장기를 걸어 놓고 국권 찬탈을 철저히 상징했다 이토록 뼈아픈 민족의 苦難史를 막기 위해 자신과 가족을 버리며 오직 쓸어져 가는 大韓帝國을 위해 몸 바친 그 이름을 義兵이라 불렀고 실로 자랑스럽고 존경스러운 이름이다. 이들 의병을 [乙巳勒約]에 의거 [韓日合邦]된 시점을 기준으로 大韓帝國이 멸망하기 이전까지 일제 침략에 항전한 것을 [義兵戰爭], 大韓帝國이 멸망한 후에 일제와 싸운 것을 [獨立戰爭]으로 구분한다. 국권 상실을 전후해 간도와 연해주 지방으로 옮겨온 의병 출신의 애국지사와 교민들은 각기 독립운동단체를 결성하고 독립군 기지를 설치하여 장차 독립전쟁에 대비한 독립군을 양성하고 있었다. 국내에서..

義兵抗爭史 2020.05.03

■ 37. [李康秊년]의 百潭寺戰鬪

義兵抗爭史 ■ 37. [李康秊년]의 百潭寺戰鬪 [李康秊]은 문경시 가은읍 상괴리 출신으로 1879년 무과에 급제했으나 일제 치하의 관직을 버리고 귀향, 1896년 1월, 문경에서 처음으로 의진을 결성, 충북 제천의 호좌의 진에 합류해 유격장으로 여러 전투에 참여하다가 동년 7월에 의병을 일단 해산하고 10년간 [유인석] 밑에서 儒學 공부에 전념하다가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고, 1907년 고종의 강제 퇴위와 군대 해산이 강행되자, [이강년]은 1907년 8월에 제천에서 다시 의병을 일으켰다. 하여, 강원. 충청. 경북 일대 八域同志에게 남긴 告訣文(이별을 고하는 글)에서 [싸움 30여 회에 죽여서 얻은 敵將의 머리만도 100여 개]라고 한 그대로 역전의 노장으로 그가 남긴 의병 투쟁사는 실로 ..

義兵抗爭史 2020.04.27

■ 36. 聯合義兵의 서울 進攻作戰

義兵抗爭史 ■ 36. 聯合義兵의 서울 進攻作戰 항일 의병 투쟁이 새로운 기세로 고조되는 가운데 의병장들에게 부과된 새로운 현실적 과제는 압도적인 왜군과 싸우기 위해서는 연합전선의 결성이었다. 국권회복을 궁극적 목표로 투쟁하고 있는 의병들로서는 서울 탈환의 꿈은 가슴에 사라지지 않는 하나의 커다란 이상이었다. 하여, [이인영] 의병장은 지방에서 제 아무리 日軍과 싸운다 해도 日軍이 서울을 장악하고 있는 한 국권회복은 불가능하다고 판단, 전국의 산발적인 의병진을 대규모 연합의병부대로 편성하여 통일된 지휘 아래 서울로 진격하여 일거에 일군을 패퇴시키려는 계획을 수립하였다. 1907년 11월 각 의병대장에게 경기도 양주로 집결할 것을 촉구하였고 이어 ‘13도 창의 대진 소원 수부’를 설치하고 의병장들의 만장일치..

義兵抗爭史 2020.04.27

■ 35. 군 강제해산 이후의 의병항쟁 영향

義兵抗爭史 ■ 35. 군 강제해산 이후의 의병항쟁 영향 군대 해산을 계기로 의병 항쟁은 극적 전기를 마게 된다. ☞첫째, 항일 항전의 확대이다. 해산 전의 활약 지역이 경기-충청-전라-경상-강원 5道와 40餘郡이었던 것이 해산 후에는 전국 주요 도시의 진위대 해산병이 지방부대와 합류 또는 단독부대로 조직함으로써 의병진의 규모는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둘째, 의병진의 전술 향상과 무기의 확충이다. ☞셋째, 의병 대열의 변화와 대열 구성의 변화이다. 군대 해산 이전의 의병장은 대부분 고관 또는 유림 양반이었는데 군대 해산 이후에 표# 에서와 같이 군인이 의병장이 되어 지도적 역할을 하게 되었다. 표# 구분 장교 하사 병 포군 계 이원(명) 22 28 33 4 87 비율(%) 25.3% 32.2% 37.9%..

義兵抗爭史 2020.04.27

■ 34. 二次 地方 眞僞隊 解散과[閔肯鎬]義兵將

義兵抗爭史 ■ 34. 二次 地方 眞僞隊 解散과 [閔肯鎬]義兵將 日帝는 서울 시위대 해산에 이어 제2차로 지방 진위대 해산에 착수하게 된다. 서울의 시위대 해산 시 상황을 전해 들은 원주 진위대 병사들은 격분하여 무기고를 장악, 1천2백 정의 소총과 4만 발의 탄약을 확보하고 원주 의병과 합세하여 원주시를 장악하고 구국항쟁을 계속하였다. 대표적으로 강원도 원주진위대 소속 특무 장교(특무상사) 출신으로 강원도 의병을 이끈 [閔肯鎬] 의병장은 군대 해산에 반발하여 무장 탈영한 병사들 중심으로 편성된 義兵部隊는 뛰어난 전술로 100여 차례 전투에서 일본군을 괴롭혔지만 [심구장] 이라고 알려진 조선인 변절자의 밀고로 일군에 체포되었는데 의병들의 구출작전으로 도주하려다 사살당하고 만다. 그가 죽기 전 강원도 관찰사..

義兵抗爭史 2020.04.27

■33.8월1일 전투

義兵抗爭史 ■33. [8월 1일 전투] 군대 해산령을 위하여 일본은 한반도에 분산 주둔하고 있던 제 13사단 병력을 서울로 집결시키고 제12여단을 추가 파병하면서 군 해산 전까지 병력통제를 강화하였다. 7월31일 야간, 군부대신 [이병무]는 사전 포병전력을 일군에 넘기고 [순종]을 협박, 군대 해산 조칙 발표를 강요하고 이완용은 [이등방문]에게 군대 해산시 민심 동요 예방과 왕명을 위반하고 폭동시 진압할 것을 요청하였다. 8월 1일, 일제 한반도 주둔 사령관 [하세가와]가 대대장급 이상 장교 전원을 소집하여 장교들은 고용 보장한다고 하면서 [대한제국군 해산]령을 먼저 발표하고, 병들에게는 군대해산계획을 숨기고 [도수 훈련][공과금 지급] 명목으로 비무장으로 [훈련원]에 소집시키니 52.7%인 1,812명..

義兵抗爭史 2020.04.26

■32. 舊韓末 軍事力

■☞ 군 강제 해산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하여 [구한말 군사력]에 대하여 덧붙인다. 義兵抗爭史 ■32. 舊韓末 軍事力 [1] 대원군 쇄국정책을 펴던 시기만 해도 조선군은 강군이었다. *병인양요는 정족산성 전투에서 프랑스군과 싸워 격퇴. *신미양요는 미군에 일방적으로 밀리긴 했는데 조선군이 너무 악착같이 싸워 결국 미군은 한양 진격 포기. #대원군 실각하고 민비 외척이 득세하여 군 기강이 문란해지면서 개판 5분 전 됨. [2] 군사력 증강 *1897년 고종은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고치고 광무개혁을 시작, 군사력 비약적 향상됨. *군사학교 설립, 장교 양성, 국가예산의 30% 이상을 증액시켜 야포, 기관총 등 현대무기 도입하여 근대적 군대로 탈바꿈하였으나 동학농민군 학살에 사용되었고, *乙未事變 [閔妃弑害] ..

義兵抗爭史 2020.04.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