義兵抗爭史 54

■ 31. 第三段階 丁未義兵

義兵抗爭史 ■ 31. 第三段階 丁未義兵 3단계의병은 1907년 7월, 국권회복을 위한 헤이그 밀사사건을 계기로 일제는 한국 식민지화를 위한 3가지 중요한 조치를 강구하게 되는데........... ☞첫째, 高宗을 강제 退位시키고 허약한 순종의 즉위시켰고, ☞둘째,정미7조약 체결을 강요, 통치권을 통감부로 하여금 장악케 하는 통치체제 강화와, ☞셋째, 8월 1일부터 대한제국군을 강제 해산 하는 등의 사태가 일어나자, 이에 국민적 저항으로 일어난 의병전쟁이 丁未義兵이다 3단계 정미의병은 해산군인이 의병전쟁에 참전함으로써 전술면에서 크게 발전하였고 국민전쟁으로 발전하게 되어 1907년 12월에 楊州에서 [허위]·[김규식]·[연기우] 등이 주도하는 연합의병 진영으로 13도창의대를 결성하여 이미 일본의 지배하에 ..

義兵抗爭史 2020.04.24

■ 30. [許蔿] 義兵將

義兵抗爭史 ■ 30. [許蔿] 義兵將 [許蔿] 선생은 1854 년 4월 1일 , 경북 선산의 대지주인 한학자 집안에서 출생 , 1895년 , 45세 때 을미사변 이 일어나고 [김홍집] 내각이 들어서며 단발령을 내리자 , 분개한 선생은 경북 김천에서 의병을 일으켜 장날을 기하여 [聖州]에 포진하여 관군과 전면전을 펼쳤으나 , 협공하는 관군을 막을 수 없어 [이은찬] , [조동호]가 전사하자 충북 진천 으로 陣을 옮길 때 고종황제로부터 의병 해산령이 내려져 자진 해산 하고 말았다. 1899 년 의 永禧殿 참봉, 성균관 박사 등에 임명되었다가 平理院 首班 判事 가 되었다. 1904 년 , 韓日議政書 강제 체결 사건으로 [이상천] , [박규병] 등과 격문을 살포하는 저항운동을 재개하였다. 1907 년 이 강제 ..

義兵抗爭史 2020.04.23

■ 29.[申乭石]의 東海岸 遊擊戰鬪

義兵抗爭史 ■ 29. [申乭石]의 東海岸 遊擊戰鬪 영남 방면 의병 중에서 가장 용감한 활동을 전개한 [申乭돌石]은 국운이 날로 기울고 일제 침략행위가 심하여짐을 보고 비분강개하여 乙未義兵 때부터 활약한 인물이다. 그는 을사조약이 전해지자 울분을 참지 못하고 1906년 4월, 그의 고향 寧海郡 福坪里에서 家産을 털어 의병을 모으니 그 수가 300명에 이르렀다. [申乭石] 義兵은 寧海邑으로 보무도 당당하게 들어가 무기 등 관군의 군수품을 접수하고 주민들을 안주시킨 다음 다시 동해안을 따라 平海邑을 차지하고 다시 병력을 증강하여 蔚珍邑에 들어가니 의병의 수가 3千名에 달하였고 [申乭石] 의병진의 명성은 크게 알려지게 되었다. 그해 11월경부터는 日月山-白岩山-大遯(둔)山-東大山 지역에서 활동하면서 진위대와 왜..

義兵抗爭史 2020.04.23

■ 28. [崔益鉉]義兵의 순창유진 ■

義兵抗爭史 ■ 28. [崔益鉉]義兵의 순창 유진 丙午義兵 중에서 군사적 행동은 미미하였지만 건국 의병 항쟁에 큰 영향을 미치고 항일 독립운동의 정신적 지표가 된 의병운동은 [崔益鉉]의 의병운동이다. 74세의 老學者인 그는 강직한 관리로 衛正斥邪運動을 전개하여 항상 抗日의 선봉에 섰기 때문에 강화조약 때 [5 불가론]의 상소로 전국 유생의 표상이 된 인물로 그의 행동은 곧 유림의 진로를 결정하는 좌표가 되었다. 3월 24일, [崔益鉉]은 前任實郡守 [임병찬]을 만나 동지 규 합을 시작하여 5월 23일, 泰仁 武城書院에서 門徒 80명을 모아 5 조약의 부당성을 강조하고, 6월 4일,향교에서 제사를 올리고 모여든 1,000여 명의 동지를 규합, 의병부대를 편성하였다. 그는 의병부대를 이끌고 全州로 向하려다가 ..

義兵抗爭史 2020.04.23

■ 27. [閔宗植]의 洪(州)城戰鬪

義兵抗爭史 ■ 27. [閔宗植]의 洪(州)城戰鬪 丙午義兵 中에서 가장 大規模 活動으로 日帝 軍警과 격전을 벌였던 義兵陣은 [閔宗植=사진]의 洪城義兵이었다. 洪城은 乙未義兵 때도 [김복한]. [이설] 等을 비롯한 전직 관리와 유생들이 중심이 되어 의병이 봉기 항쟁했던 곳이고, 1906년 3월 중순경에도 먼저 [林秉瓚]. [朴昌魯]. [蔡光默]등이 수천 명의 의병을 모아 홍성을 점거하려다 실패한 곳이다. 하여, 1906년 5월 11일, 참판을 역임한 바 있는 [閔宗植]은 [金光祐]. [趙羲洙]. [鄭在鎬]. [黃英秀] 等과 홍산에 모여 擧義할 것을 결의하고 舒川에 다다르니 의병수가 1천여명에 이르고, 板橋 - 藍浦 입성 때는 1만 군사로 증가했다. 의병진은 계속 행진하여 保寧을 지나 結城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義兵抗爭史 2020.04.22

■ 26.再起 義兵의 上疏와 蜂起

義兵抗爭史 ■ 26.再起 義兵의 上疏와 蜂起 丙午 義兵 中에서도 가장 먼저 再起한 地方은 [乙未義兵] 당시 [柳麟錫]을 중심으로 湖左義兵陣의 활동지였던 原州.堤川.丹陽을 중심으로 한 中部地方이었다. 乙巳條約이 있기 2개월 전인 1905년 2월 중순경, 義擧를 결정한 [元容八]은 많은 親知 志士 및 민중들의 호응을 얻어 1천여 명을 모집하여 훈련을 하면서 신망 있고 유능한 인물을 찾고 있었다. 이 같은 정보를 입수한 원주 진위대는 [一進會員]들을 시켜 와해 공작을 하는 한편 [元容八]을 追跡, 橫城에서 체포하니 의병진은 와해되고 만다. 왜군 : [풀어주면 다시는 군사를 일으키지 않겠느냐?] [元容八]:[동대문 밖에 나가면 다시 군사를 일으키겠다] 왜군 :[누구와 함께 군사를 일으키겠느냐?] [元容八] :[..

義兵抗爭史 2020.04.22

■ 25. 第二段階 丙午義兵抗爭

義兵抗爭史 ■ 25. 第二段階 丙午義兵抗爭 ☞1904년 2월, 러.일전쟁이 발발되면서 대한정부를 위협,[韓.日議定書]를 체결하고 한국의 토지를 일제의 군용지로 수용할 수 있는 권리를 획득하였으며, ☞8월에는 재정 외교 고문을 파견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韓.日協約]을 체결함으로써 침략을 본격화하더니 ☞1905년 9월,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의 중재로 [포오츠머츠조약]이 체결되고 전쟁이 일제의 승리로 돌아가자 일제는 즉각 영국과는 [영.일동맹]. 미국과는 [가쓰라-TAFT협약]을 체결하고 이들 열강의 양해 하에 朝鮮을 保護國化하는 工作을 꾸미게 된다. ☞1905년 11월, 특사로 조선에 온 伊藤博文은 [보호 조약안]을 고종에게 제출하자, 고종 : [이 일은 중대사이니 짐이 혼자 결정할 수 없다. 짐이 정부..

義兵抗爭史 2020.04.21

■ 24.慶尙義兵陣의 晋州戰鬪

義兵抗爭史 ■ 24.慶尙義兵陣의 晋州戰鬪 진주지방에서는 高宗의 아관파천이 있은 1주일 후인 2월 19일, 儒學者 [盧應奎]는 同志 [徐再起]. [鄭道鉉].[[朴準弼]. [林景熙] 等과 의병을 모집, 향교 근처 집결하여 觀察府를 습격하고 순검들을 처단하니 觀察使 [趙東弼].警務官 [金世鎭] 等이 모두 도주하여 義兵陣은 무난히 晋州府를 차지할 수 있었다. 진주 경내에는 [鄭漢鎔]이 지방 의병을 모집하여 입성하니 진주 일대는 의병 세력으로 뒤덮었고 항일의 함성은 천지를 진동했다. 한편, 의병진의 습격을 받아 大邱로 逃走했던 晋州 警務官 [金世鎭]이大邱 駐在 官軍 100명을 이끌고 진주로 향하던 중 의령에서 매복하여 기다리던 진주 의병의 先鋒將 [徐再起]의 습격으로 敗走하였다. 이렇게 되니 의병의 세력은 더욱 ..

義兵抗爭史 2020.04.21

■ 23.慶尙義兵陣의 安東戰鬪

義兵抗爭史 ■ 23.慶尙義兵陣의 安東戰鬪 경상도의 의병 봉기는 먼저 퇴계 [李滉]과 서예 [유성용]의 고향이요 儒林의 중심지로 알려진 安東地方에서 일어났다. ☞1896년 1월 17일, 안동의 儒生들은 단발령 직후 儒生 [郭鐘錫]. 都事 [金道和]. 持平 [金興洛]等 223명이 향년 60세의 [權世淵]을 의병대장으로 추대하고 통문을 돌려 倡義를 외치니 [안동 의병진]은 10여 일 만에 그 수가 4만 명으로 증가하였다. ☞1월 28일, 의병 봉기로 도망갔던 安東觀察使 [金奭中]이 친위대 병력을 이끌고 쳐들어오니 급조되고 훈련이 미숙한 의병들이 감당해 내지 못하여 사방으로 흩어지고 [權世淵]은 2개월 만에 의병장직에서 물러나고 만다. 하지만 오랫동안 抗日思想으로 뭉쳐있던 이지방 인사들의 氣槪는 꺾이지 않았다...

義兵抗爭史 2020.04.21

■ 21-3.[柳麟錫]의 忠州城戰鬪와 西北移動

義兵抗爭史 ■ 21-3. [柳麟錫]의 忠州城戰鬪와 西北移動 충주성을 장악한 지 18일째인 ☞3월 5일, 호좌 의병은 일본군과 친일 관군의 양면 공격을 받고 식량과 탄약 부족으로 고생하였다. 이에 의병장 [유인석]은 입성한 지 18일 만에 제천으로의 퇴각을 결정, 깊은 밤을 틈타 은밀히 충주성을 빠져나와 내주-淸風을 거쳐 堤川城으로 후퇴하였다. ☞4월 23일, 앞서 남한산성 공방전에서 의병진을 격파한 서울 관군과 왜군은 호서 의병의 남하를 서서히 추격하면서 지역 내 적군과 합세하니 戰雲은 짙어지게 된다. 하여, 관군은 신무기와 대병력으로 제천 성을 4면 포위 총공세를 가해 오니 ☞5월 23일, 제천 성이 피탈되고 만다. ☞7월 11일, [유인석]은 제천 성을 빠져나와 영월-평창-강릉을 지나 大和에 도착하니..

義兵抗爭史 2020.04.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