義兵抗爭史 54

■13.壬辰亂 義兵抗爭의 義意

義兵抗爭史 ■13.壬辰亂 義兵抗爭의 義意 壬辰倭亂時 의병들의 대소 전투는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으며 그중 활약상이 컸던 1592년부터 1593년 간의 대표적인 몇몇 전투를 실었으며 그 외에도 [김면]-[정인홍]-[손인갑]의 부계 전투, [양대박]의 운암 전투, [손인갑]의 초계현 마진 전투, [김면]-[김준민]의 우척현 부근 전투, [곽재우]-[윤탁]-[주몽룡]의 영산 전투, [유종게]의 소천 전투, [이정암]의 연안성 전투, [임 중량]-[윤붕]의 중화 전투 등 의병항쟁이 많으나 지면 관계로 모두 싣지 못하여 참으로 유감스럽기만 하다. 조선 왕조는 사화와 당쟁으로 국력이 약화되고 국방은 소홀한 틈에 왜군의 침략하자 순식간에 수도 한양이 함락되고 파죽지세로 평안도, 함경도로 북상하였다. 조선의..

義兵抗爭史 2020.04.17

■12-2.[金千鎰]의 第二次 晋州城 戰鬪

義兵抗爭史 ■12-2. [金千鎰]의 第二次 晋州城 戰鬪 ☞6월 19일, 9만 왜군이 의령에서 진주성으로 진출, ☞6월 20일, 적의 선봉대가 이미 진주성 동쪽 마현봉 위에 나타나 검광을 번쩍였다 ☞6월 21일, 적의 대군이 성을 3중 포위했으나 총포는 한 발도 쏘지 않았으므로 성중에는 조금도 동요하는 기색이 없으니 적은 마침내 물러갔다 ☞6월 22일 10시경부터 제1파,제2파가 연속으로 동문 성벽으로 진입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자 한밤중에 제3파가 공격해 오자 철환고 불화살을 쏘아 격퇴했다 ☞6월 23일, 주간에 왜군은 조총을 난사하면서 성 주변 호수에 흙,돌 풀더미를 메꾸고 성벽 초석을 파내면서 3회에 걸쳐공격해 왔으나 아군의 분전으로 격퇴하였다 ☞6월24일, 아군이 완강하게 저항을 계속하자 5~6천명을..

義兵抗爭史 2020.04.16

■12-1. [金千鎰]의 第二次 晋州城 戰鬪

義兵抗爭史 ■12-1. [金千鎰]의 第二次 晋州城 戰鬪 왜군은 평양성이 피탈된 후 서울로 총퇴각 하였고, 의병들에 의해 各地城 間 교통이 차단되면서 식량난으로 위기감이 고조된다. 벽제관 전투에서 반전이 일어나나 했던 전황은 행주 대첩으로 인하여 주도권이 조선-명 연합군측으로 기울어 심각한 손실을 더는 견디지 못한 왜군은 결국 개전 1년만인 1593년 3월에 부산포로 총퇴각하게 되고, 퇴각후 왜군은 6월 초부터 慶尙右道 및 全羅道 공략과 동시 화전양면책을 시도한다. 이에 따라 6월15일에는 함안을, 6월 16일에는 班城을, 6월 18일에는 낙동강을 건너 의령으로 진격한다. 한편,조선군은 全羅兵使 [宣居怡]와 忠淸 조방장 [洪秀男] 等이 함안을 방어하고, 성주목사가 된 郭再祐 等이 鼎岩津을, 진주목사 [徐禮..

義兵抗爭史 2020.04.16

■11.[정문부]의길주장평 전투

義兵抗爭史 ■11. [정문부]의 길주 장평 전투 의병대장 [정문부]는 임진년 9월 16일 경성전투에서 적을 격파하고 반적 [국경인]과 [정말수]를 처단하고 경성지역을 안정시키자 [韓仁濟] 等 여러 장수가 호응하여 병력이 수천명에 달하게 되었다. 하여 [李應星]에게 군사 700명을 주어 鏡城을 지키게 하고 10월 21일, [정문부]는 군사 1,000여 명을 이끌고 明川으로 나아가 陣을 치니 길주목사 [鄭熙績]과 輸城察訪 [崔東望]이 1,000여명 병력을 이끌고 합세했다. 왜적은 吉州城內에 1,000여 명이 주둔하고 있었고, 300명의 군사는 길주 남쪽 80리 거리인 嶺東館 柵城을 지키게 하였는데 이들은 10명에서 100명씩 떼지어 다니며 나무도 베고 사방 촌가에 약탈과 살상 등 횡포가 극심하였다. [정문부..

義兵抗爭史 2020.04.15

■10.[鄭文孚]의 鏡城戰鬪

義兵抗爭史 ■10. [鄭文孚]의 鏡城戰鬪 敵將 [加藤淸正]은 군사를 길주 이남에만 배치한 후, 鏡城에는 叛賊 [鞠世弼]을, 會寧에는 叛賊 [鞠景仁] 等을 배치하여 군민의 행정을 統轄하게 하고 자신은 豆滿江邊에서 安邊으로 돌아갔다. [鄭文孚]는 오랫동안 경성 유생인 [池達源]의 집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池達源]은 [鄭文孚]와 봉기하기로 하고 의병을 모집하기 시작했는 데수일만에 前 萬戶 [姜文佑]를 비롯하여 향병 수백 명을 모집하였고 또 산중에 숨어 있던 鐘城府使 [鄭見龍]과 慶源府使 [吳應대] 等이호응해 왔다. 임진년 9월 15일, 의병장 [鄭文孚]는 義兵旗를 세우고 鏡城의 叛賊 [鞠世弼]을 공격하게 되었다. 왜적으로 부터 兵使로 임명되어 鏡城을 지키고 있던 [鞠世弼]은 의병들의 기습공격에 당황하여 성문을..

義兵抗爭史 2020.04.15

■ 9. 二次 錦山城 戰鬪

義兵抗爭史 ■ 9. 二次 錦山城 戰鬪 1592년 7월 10일에 있었던 1次 錦山戰鬪에서 [高敬命]의 의병대와 관군의 연합부대가 錦山城의 탈환을 시도하였다가 潰滅되었었고 이후로 몇몇 의병대와 조선관군이 성의 탈환을 시도하였으나 번번이 실패하였다 ☞8월 1일, 淸州에서 [히치 스카 이에마사]가 지휘하는 倭 第5軍 後方部隊를 격파하여 淸州城을 탈환한 義兵將 [趙憲]과 僧兵長 [영규], 그들의 다음 목표는 조선군이 번번이 탈환에 실패한 錦山城이었다 금산성에 주둔하고 있는 [고바야카]와 [다카 카케]의 왜5군은 1만 명, 거기다 왜5군은 그간 전라도의 침공을 여러 번 시도하여 조선군과의 전투 경험도 여러번 쌓은 상대하기 버거운 적이었다. [趙憲]과 [영규]의 연합부대는 의병 1,000여명과 승병 800여 명으로 ..

義兵抗爭史 2020.04.15

■ 8. 官義僧 聯合軍의 淸州城 戰鬪

義兵抗爭史 ■ 8. 官義僧 聯合軍의 淸州城 戰鬪 明軍의 참전에 따라 長期籠城戰이 불가피함을 인식한 日軍은 군량을 조달하기 위해 湖南으로의 진출을 생각하게 되었고 [히치 스카 이에마사]가 지휘하는 倭 제5군 후방부대는 중간 거점으로 淸州를 설정, 6월 23일경에 淸州城을 점령하게 된다. 이에 忠淸道 방위 책임자인 巡察使 [尹國馨]은 防禦使 [이옥]과 [조방자], [尹慶祺]로 하여금 淸州城을 공략하게 하였으나 [이옥]이 지휘하는 官軍은 淸州城 공략에 실패하였다. 하여, [趙憲] 義兵將의 총지휘 하에 , 靈圭大師의 僧兵과 [朴春茂]의 淸州 義兵 그리고 연기현에 주둔하고 있는 [이옥]의 官軍 등이 合軍하여 倭軍에게 함락되었던 淸州城을 탈환하게 하였다. 이들 官義兵 合同軍은 淸州城을 탈환하기 위해 8월 1일 새벽..

義兵抗爭史 2020.04.14

■ 7. 官.義 聯合軍의 慶州城戰鬪

義兵抗爭史 ■ 7. 官.義 聯合軍의 慶州城戰鬪 왜적은 곽재우 의병군의 공격으로 형풍-창녕- 영산을 포기함에따라 낙동강 보급선을 상실하게 되었고, 영천성 마저 탈취당함으로써 안동 보급선이 차단 당하자 마지막 보급선인 양산-밀양-청도-대구-안동-문경-충주를 잇는 中路의 동측방을 보호하기 위해 경주성을 확보코자 심혈을 기우리고 있었다. 이를 위해 양산성을 수비하던 병력 중 정병 5백여명을 선발, 언양에 증파하여 경주성 부근의 의병소탕에 나서게 된다. 한편,경주에서 군사훈련을 하고 있던 경주인 [金虎]는 초유사 金誠一로부터 義兵都大將 명을 받고 8월 2일, 義兵1,400여명을 지휘하여 언양 방면으로 진군하여 증파되었던 왜적을 포위 공격하자 왜적들은 4분5열 되어 경주 본진으로 퇴패하였다. 이후,安康에 있던 慶尙..

義兵抗爭史 2020.04.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