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南 漢 山 城[24] ▣南 漢 山 城[24] 몽골군이 자행된 "포로사냥""인간사냥"은 1636년 12월부터 1637년1월 사이에 무려 50만명이였다니 이 얼마나 치욕스런 역사인가? 청군에 붙잡히는 과정에서도, 압록강을 건너 심양에 이르기까지도, 마지막으로 간신히 도망쳐 조선으로 돌아오는 귀향길에서도 조선인 포로들.. 南漢山城 2012.12.29
▣23.南 漢 山 城[23] ▣南 漢 山 城[23] 한국에 근대적 센서스가 처음 실시된 것은 1925년이었고 그때 인구가 1,902만30명이었다. 학자들은 이 숫자에 0.75~1.31%의 추정 인구증가율을 대입, 逆算하면1,636년 당시의 인구는 1,000만명도 안되었을 것이다. 당시 중국 인구는 약 3억명, 일본은 약 4,000만명으로, 한국에 비해.. 南漢山城 2012.12.28
▣22.南 漢 山 城[22] ▣南 漢 山 城[22] 인조임금으로부터 구두례를 치룬 청태종은 철군명령을 내리게 된다. 하여, 淸나라 군사들은 세방면으로 나누어 철수했고, 음력 2월 2일, 임금은 길가에 나와 돌아가는 청태종을 전송했다. 끌려가는 세자와 빈궁과 왕자들은 청태종의 뒷쪽 수레에 실려 있었다. 가노라 삼.. 南漢山城 2012.12.28
▣21.南 漢 山 城[21] ▣南 漢 山 城[21] 인조가 3배를 마치자 청태종이 가까이 불렀다. 조선왕은 양쪽으로 청의 군장들이 도열한 계단을 따라 9층으로 올라갔다. 인조가 7층계단을 지날 때 강화에서 끌려온 시녀들이 손으로 입을틀어막으며 북받치는 울음을 참았다. 9층단에는 술상이 차려져 있었다. 청태종이 .. 南漢山城 2012.12.28
▣20.南 漢 山 城[20] ▣南 漢 山 城[20] 청태종 홍타이지는 9층 단위에서 조선 임금을 기다렸다. 강화도에서 끌려온 빈궁과 대군 그리고 시녀들이 7층 단 서쪽에 꿇어 앉았고, 9층 단으로 오르는 계단 양쪽에 청(淸)의 왕자와 군장들이 깃발을 세우고 도열했다. 인조왕은 9층 단아래 도착하여 말에서 내려 읍했다.. 南漢山城 2012.12.28
▣19.南 漢 山 城[19] ▣南 漢 山 城[19] 윤집은 서른살이었고, 처와 세 아들이 南陽으로 피난을 갔는데 남양이 함몰되어 생사를 모르고. 오달제는 스물일곱살로 성밖에 노모와 임신한 처가 있다고 했다. 임금은 서안에 쓰러져 오열했다 . 흘러내린 눈물이 턱으로 흘러 내렸다. "누가 인도 하려는가?" "최명길"이 .. 南漢山城 2012.12.28
▣18.南 漢 山 城[18] ▣南 漢 山 城[18] 청태종 홍타이지의 서신에 임금은 답할 차례가 됐다 젊은 당하관 윤집과 부교리 오달제가 척화신으로 묶여서 淸陣에 가기를 자청했다. "신 들이 극언으로 화친을 배척하여 성충을 흐리고 나라를 그르쳤으니 신 들을 보내어 적의 요구에 응하시고 사직과 강토를 보전하.. 南漢山城 2012.12.28
▣17.南 漢 山 城[17] ▣ 南 漢 山 城[17] 임금은 이런 상황을 모르고 적장이지만 설날 예의를 지킴이 마땅하다면서 칸에게 사신을 보냈다. 그러나 청태종 홍타이지는 임금이 보낸 사신을 만나지않고 되돌려보내고는 出城과 和親의 길을 묻는 문서를 보내왔다. "네가 기어이 나의 적이 되어 거듭 거스르고 어긋.. 南漢山城 2012.12.28
◈16.南 漢 山 城[16] ◈南 漢 山 城[16] 이러한 광경을 청태종"홍타이지"는 망월봉 꼭대기에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참 난해한 나라로구나. 아주 어깨지는 말자... 부수기보다는 스스로 부서져야 새로워질 수 있겠구나...." 20만 대병력을 몰고 와 소규모 부대로 성벽에 다가가 토끼사냥하듯 투닥그리는 싸움이 .. 南漢山城 2012.12.28
▣15.南 漢 山 城[15] ▣南 漢 山 城[15] 설날 아침에 광주목사가 쌀 한말로 가래떡을 뽑아 행궁에 열가래를 올리고, 백관들에게 한가래씩을 돌렸다. 임금은 곤룡포에 면류관을 쓰고 정축 원단에 산성의 내행전 마당으로 내려왔다. 조선 국왕이 북경을 향하여 明나라 천자에게 올리는 望闕禮를 시행하기 위함이.. 南漢山城 2012.12.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