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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丙子胡亂時 義兵抗爭

義兵抗爭史 ■ 16.丙子胡亂時 義兵抗爭 丙子胡亂 때의 義兵 活動도 정묘호란 때와 같이 湖南地方이 가장 활발했다. 仁祖가 南漢山城에 包圍되어 나라의 運命이 危機에 直面하게 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玉果縣監 [李興浡발]. 大同察訪 [李起浡발]. 淳昌縣監 [崔薀온]. 前翰林 [梁曼容]. 前察訪 [柳집] 等은 의병을 규합하고 군량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12월 19일, 仁祖의 敎書가 전해지자 의병 모집에 더욱 박차를 가하여 募義廳을 설치하고 道內에 檄文을 전하는 한편 道에는 募義都有司를, 各邑에 募義有司를 두었는데...... [曺守城]. [曺엽] 等은 和順에서, [柳玶]은 光州에서, [金선]. [羅海鳳] 等은 羅州에서 起義하여 1월 20일, 여산에 집결한 호남 의병들은 大司諫으로 있던 [鄭弘溟명]이 召募使로 公州..

義兵抗爭史 2020.04.18

■15. [鄭鳳壽]의 龍骨山城 戰鬪

義兵抗爭史 ■15. [鄭鳳壽]의 龍骨山城 戰鬪 후금군은 1627년 3월 3일, 강화가 성립되었음에도 불구하고 明將 [모문용]을 체포한 다음 철군한다는 구실로 평양지역에 주둔, 군사들이 사방에서 약탈과 살육을 자행했다. 이같은 후금군의 만행에 관서지방 의병들은 자위의 전투를 할 수 밖에 없었고 조정에서도 의병활동을 은근히 지지하니 곳곳에서 전투가 계속되었고 그중 가장 치열했던 것이 龍骨山城戰鬪이다. 龍骨山城은 의주와 철산 중간지점에 위치한 높이 477m의 지형이 험준한 천연요새이었다. 당시 이 산성에는 鐵山,靈山,義州 等地의 피난민이 모여 있었는데 그들은 前 청산-영산의 현감을 역임한 바 있는 [鄭鳳壽]를 의병장으로 추대했다. 추대된 [鄭鳳壽]는 4천여명의 의병을 모집하고 산성 출신 [金宗敏]을 中軍으로,..

義兵抗爭史 2020.04.17

□14-2. 丁卯胡亂時 湖南.湖西地方 義兵抗爭

義兵抗爭史 □14-2. 丁卯胡亂時 湖南.湖西地方 義兵抗爭 앞서 와 같은 亂中에 各地에서 義兵이 蜂起하여 後金軍과 치열한 전투를 전개하여 비록 불리한 戰局을 好轉시키지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하였지만 강화 성립 후까지도 계속되었다. 특기할 의병 활동은 1627년 1월 19일, 兩湖號召使 [호남, 호서지방 병력 모집관]으로 임명된 前行護軍 [金長生]을 중심으로 의병이 조직되었다. 80세 高齡인 그는 號召使 諭旨와 印信을 받자 불편한 몸을 이끌고 各地에 檄文을 보내 의병 모집에 나선다. 하여, [金長生]은 前府使 [宋興周]를 副使로, 前持平 [尹전]을 從事官으로 삼고 회덕, 광주, 무창, 고창, 태인, 전주, 남원, 나주, 김제, 영광, 고산, 장성, 부안, 보령, 연산 등 各邑에 모집원을 두어 의병을 모으는 한..

義兵抗爭史 2020.04.17

■ 관서지방의병 활동

義兵抗爭史 ■14-1. 정묘호란 시 關西地方 義兵抗爭 인조반정 후 집권한 서인 정권은 친명배금 정책을 내세웠는데... 후금은 명나라를 정벌하기 앞서 조선을 정벌함으로써 후환을 없이하고 조선과의 通交로 무역상의 이득을 취함으로써 자국의 부족한 물자를 보충하려 하였다. 하여, 누르하치의 뒤를 이은 태종은 1627년 1월 13일, 그의 從兄 [阿敏]을 司令官으로 삼아 3만 명의 병력으로 조선을 침공하게 했다. 한편, 조선은 임진왜란의 상흔이 채 가시지도 않은 상태인 데다 인조반정 세력은 정권 안정을 위한 都城防衛와 西北邊防衛의 강화가 중요 현안이었다. 하여, [張晩]을 都元帥로 삼아 평양에 본영을 설치케 하고 [李适]을 平安兵使 兼 副元帥로 삼아 寧邊에 駐在하면서 西北邊을 방어토록 하였다. 그런데 仁祖 2년 ..

義兵抗爭史 2020.04.17

■13.壬辰亂 義兵抗爭의 義意

義兵抗爭史 ■13.壬辰亂 義兵抗爭의 義意 壬辰倭亂時 의병들의 대소 전투는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으며 그중 활약상이 컸던 1592년부터 1593년 간의 대표적인 몇몇 전투를 실었으며 그 외에도 [김면]-[정인홍]-[손인갑]의 부계 전투, [양대박]의 운암 전투, [손인갑]의 초계현 마진 전투, [김면]-[김준민]의 우척현 부근 전투, [곽재우]-[윤탁]-[주몽룡]의 영산 전투, [유종게]의 소천 전투, [이정암]의 연안성 전투, [임 중량]-[윤붕]의 중화 전투 등 의병항쟁이 많으나 지면 관계로 모두 싣지 못하여 참으로 유감스럽기만 하다. 조선 왕조는 사화와 당쟁으로 국력이 약화되고 국방은 소홀한 틈에 왜군의 침략하자 순식간에 수도 한양이 함락되고 파죽지세로 평안도, 함경도로 북상하였다. 조선의..

義兵抗爭史 2020.04.17

■12-2.[金千鎰]의 第二次 晋州城 戰鬪

義兵抗爭史 ■12-2. [金千鎰]의 第二次 晋州城 戰鬪 ☞6월 19일, 9만 왜군이 의령에서 진주성으로 진출, ☞6월 20일, 적의 선봉대가 이미 진주성 동쪽 마현봉 위에 나타나 검광을 번쩍였다 ☞6월 21일, 적의 대군이 성을 3중 포위했으나 총포는 한 발도 쏘지 않았으므로 성중에는 조금도 동요하는 기색이 없으니 적은 마침내 물러갔다 ☞6월 22일 10시경부터 제1파,제2파가 연속으로 동문 성벽으로 진입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자 한밤중에 제3파가 공격해 오자 철환고 불화살을 쏘아 격퇴했다 ☞6월 23일, 주간에 왜군은 조총을 난사하면서 성 주변 호수에 흙,돌 풀더미를 메꾸고 성벽 초석을 파내면서 3회에 걸쳐공격해 왔으나 아군의 분전으로 격퇴하였다 ☞6월24일, 아군이 완강하게 저항을 계속하자 5~6천명을..

義兵抗爭史 2020.04.16

■12-1. [金千鎰]의 第二次 晋州城 戰鬪

義兵抗爭史 ■12-1. [金千鎰]의 第二次 晋州城 戰鬪 왜군은 평양성이 피탈된 후 서울로 총퇴각 하였고, 의병들에 의해 各地城 間 교통이 차단되면서 식량난으로 위기감이 고조된다. 벽제관 전투에서 반전이 일어나나 했던 전황은 행주 대첩으로 인하여 주도권이 조선-명 연합군측으로 기울어 심각한 손실을 더는 견디지 못한 왜군은 결국 개전 1년만인 1593년 3월에 부산포로 총퇴각하게 되고, 퇴각후 왜군은 6월 초부터 慶尙右道 및 全羅道 공략과 동시 화전양면책을 시도한다. 이에 따라 6월15일에는 함안을, 6월 16일에는 班城을, 6월 18일에는 낙동강을 건너 의령으로 진격한다. 한편,조선군은 全羅兵使 [宣居怡]와 忠淸 조방장 [洪秀男] 等이 함안을 방어하고, 성주목사가 된 郭再祐 等이 鼎岩津을, 진주목사 [徐禮..

義兵抗爭史 2020.04.16

■11.[정문부]의길주장평 전투

義兵抗爭史 ■11. [정문부]의 길주 장평 전투 의병대장 [정문부]는 임진년 9월 16일 경성전투에서 적을 격파하고 반적 [국경인]과 [정말수]를 처단하고 경성지역을 안정시키자 [韓仁濟] 等 여러 장수가 호응하여 병력이 수천명에 달하게 되었다. 하여 [李應星]에게 군사 700명을 주어 鏡城을 지키게 하고 10월 21일, [정문부]는 군사 1,000여 명을 이끌고 明川으로 나아가 陣을 치니 길주목사 [鄭熙績]과 輸城察訪 [崔東望]이 1,000여명 병력을 이끌고 합세했다. 왜적은 吉州城內에 1,000여 명이 주둔하고 있었고, 300명의 군사는 길주 남쪽 80리 거리인 嶺東館 柵城을 지키게 하였는데 이들은 10명에서 100명씩 떼지어 다니며 나무도 베고 사방 촌가에 약탈과 살상 등 횡포가 극심하였다. [정문부..

義兵抗爭史 2020.04.15

■10.[鄭文孚]의 鏡城戰鬪

義兵抗爭史 ■10. [鄭文孚]의 鏡城戰鬪 敵將 [加藤淸正]은 군사를 길주 이남에만 배치한 후, 鏡城에는 叛賊 [鞠世弼]을, 會寧에는 叛賊 [鞠景仁] 等을 배치하여 군민의 행정을 統轄하게 하고 자신은 豆滿江邊에서 安邊으로 돌아갔다. [鄭文孚]는 오랫동안 경성 유생인 [池達源]의 집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池達源]은 [鄭文孚]와 봉기하기로 하고 의병을 모집하기 시작했는 데수일만에 前 萬戶 [姜文佑]를 비롯하여 향병 수백 명을 모집하였고 또 산중에 숨어 있던 鐘城府使 [鄭見龍]과 慶源府使 [吳應대] 等이호응해 왔다. 임진년 9월 15일, 의병장 [鄭文孚]는 義兵旗를 세우고 鏡城의 叛賊 [鞠世弼]을 공격하게 되었다. 왜적으로 부터 兵使로 임명되어 鏡城을 지키고 있던 [鞠世弼]은 의병들의 기습공격에 당황하여 성문을..

義兵抗爭史 2020.04.15

■ 9. 二次 錦山城 戰鬪

義兵抗爭史 ■ 9. 二次 錦山城 戰鬪 1592년 7월 10일에 있었던 1次 錦山戰鬪에서 [高敬命]의 의병대와 관군의 연합부대가 錦山城의 탈환을 시도하였다가 潰滅되었었고 이후로 몇몇 의병대와 조선관군이 성의 탈환을 시도하였으나 번번이 실패하였다 ☞8월 1일, 淸州에서 [히치 스카 이에마사]가 지휘하는 倭 第5軍 後方部隊를 격파하여 淸州城을 탈환한 義兵將 [趙憲]과 僧兵長 [영규], 그들의 다음 목표는 조선군이 번번이 탈환에 실패한 錦山城이었다 금산성에 주둔하고 있는 [고바야카]와 [다카 카케]의 왜5군은 1만 명, 거기다 왜5군은 그간 전라도의 침공을 여러 번 시도하여 조선군과의 전투 경험도 여러번 쌓은 상대하기 버거운 적이었다. [趙憲]과 [영규]의 연합부대는 의병 1,000여명과 승병 800여 명으로 ..

義兵抗爭史 2020.04.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