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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5. 在日學徒義勇軍

義兵抗爭史 ■ 55. 在日學徒義勇軍 1950년 6월 25 일 ,북괴의 불법 남침 소식이 알려지자 학생을 중심으로 한 재일동포 청년들이 조국방위를 위해 민단중앙사무소에 모여 의용군지원병 모집을 결의하고 6월 29일, 각지 민단본부에 의용군접수소가 설치되었다. 민단중앙은 주일대표부를 통해 재일동포 청년의 의용병 파견을 협의하였으나 당초 한국정부는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였다. 그러나 인천상륙작전에 통역과 길안내 요원의 필요에 따른 윌로비(Charles A, Willoughby) 소장의 요청으로, 642명이 선발되어 미8군에 편입, 참전하게 된다. 이들은 사격·제식훈련 등 2주간의 단기속성 군사훈련을 마친 재일의용병은 1진 76명이 1950년 9월 중순 인천상륙작전에 투입된 이래 모두 여섯 차례에 걸쳐 한국에 들..

義兵抗爭史 2020.05.10

■ 54. 學徒義勇軍의 浦項戰鬪

義兵抗爭史 ■ 54. 學徒義勇軍의 浦項戰鬪 북괴군은 낙동강 교두보를 돌파하기 위해 2개 사단을 포항 방면에 집중시켜 대공세를 시도하였다. 이 무렵, 大邱에서 결성됐던 [대한 학도의용대] 87명은 [金錫源] 將軍이 지휘하는 安東 주둔 首都師團에 들어가 안동 철수작전에 처음으로 전투에 참전한 뒤, 16명은 수도사단에 정식 입대하고 나머지 71명은 귀가해도 좋다는 사단장의 명령을 받았지만 학도들은 [김석원] 장군을 따라가 3사단이 위치한 포항으로 이동, 당시 포항여중에 위치한 3사단 후방지휘소에서 임시 대기하게 되었다. 사단 후방 사령부에는 대부분의 병력을 전방 전투에 투입하여 연락 장교와 군악대원 20여 명만 잔류하고 있었다. 8월 11일 새벽 3시경, 북괴군은 국군 제3사단을 포항 북방에 고립시키고 인민군..

義兵抗爭史 2020.05.10

■ 54. 學徒義勇軍

義兵抗爭史 ■ 54. 學徒義勇軍 ▶ 따라서 모병 가능한 지역은 경남북 일대뿐이어서 정부는 경남북 일대 곳곳을 다니며 18~30세까지는 눈에 보이는 대로 강제 입대시켰고. 전황의 급해지자 배속 장교들이 전황을 알리면서 『조국을 구하기 위해 학생들이 전선으로 나가 싸워야 하지 않겠느냐』는 學徒兵 지원 권유에 감동하여 대구나 부산 등 대도시에 피란 온 학생과 현지 학생들의 지원도 줄을 이었다. 이렇게 하여 모집된 학도병은 "훈련이라곤 3일간 기초 군사 훈련을 받은 후, 수성구에 있는 대구농림학교로 이동해 단발 장전식인 9·9식 일제 소총을 지급받았고 다시 3일 후 사단에 배속, 곧바로 戰線인 안동에 투입되어 M1 소총이 지급되었다. 훈련받을 때와는 다른 총이라 탄약을 장전할 때 많은 학생들이 손을 다쳤다. ▶..

카테고리 없음 2020.05.08

■ 53. 學徒 義勇軍 募集 背景

義兵抗爭史 ■ 53. 學徒義勇軍 募集 背景 ▶ 전황 북괴군은 천안까지 제4사단을 후속하던 제6사단장 [방호산] 소장은 방어에 개방되어 있는 호남지방으로 우회기동하여 질풍 같은 기세로 ☞7월 19일, 금강을 넘어 익산으로 진출, ☞7월 20일, 전주, ☞7월 23일, 광주, ☞7월 25일, 순천 동쪽까지 진격, 140km 거리에 있는 부산 공격을 위해 숨을 고르고 있었다. 한편, 미 제8군 사령관 [워커] 장군은 ☞7월 20일, 미 제24사단이 대전에서 궤멸되자, ☞7월 18일에 영일만에 상륙한 미 제1기갑사단 주력을 영동 정면에 전개하여 경부 도로 전면을 방어토록 하고, ☞ 미 제24사단으로 부산 서측방의 거창-안의-진주-사천을, ☞ 미 제25사단으로 상주 정면을 ☞ 한국군과의 작전지경선을 상주 북쪽에서..

義兵抗爭史 2020.05.08

■ 52. 韓國戰爭과 學徒義勇軍

*48. 靑山里 戰鬪 背景 : 생략 *49. [金佐鎭]의 靑山里 戰鬪 : 생략 *50. 光復軍 創設 : 생략 *51. 光復軍 活動 ; 생략 義兵抗爭史 ■ 52. 韓國戰爭과 學徒義勇軍 1950년 6월 26일 11:00시경 각급학교는 등교한 학생들을 연병장에 집합시켜 북괴 남침을 알리고 교령을 발표하자 서울 시내 각 중학교부터 대학 교정에서는 북괴 남침을 규탄하고 괴뢰 도당을 타도하자는 궐기대회가 열렸고 마침내 학도결사대원으로 지원하고 나서게 된다. 하여, 풍전등화 같았던 조국을 구하기 위해 서슴없이 전쟁터에 뛰어들었던 학도의용군, 그들의 나이는 15세에서 20대 초반까지의 학생 신분의 어린 청년들이 교복과 교모를 그대로 착용한 채 총을 들었다. 그들은 개별적으로 수십 명씩 부대를 찾아와 싸우게 해달라고 간..

義兵抗爭史 2020.05.08

■ 46. [洪範圖]의 鳳梧洞戰鬪

義兵抗爭史 ■ 46. [洪範圖]의 鳳梧洞戰鬪 1920년 6월 4일 새벽, [朴承吉]이 지휘하는 독립군 소대 30여 명이 두만강을 건너 함경북도 鐘城 북방 5里 지점의 江陽洞으로 진입, 일본군 헌병 순찰 소를 격파한 뒤, 날이 저물무렵 두만강을 건너 귀환하였다. 이 패배를 설욕하고자 일제는 南陽守備隊 소속 1개 중대와 헌병경찰중대로 독립군을 추격케 하였으나 三屯子에 이르러 독립군부대를 발견하지 못하자 무고한 양민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러 독립군이 반격하여 전멸시켰는데 이것이 鳳梧洞 戰鬪의 緖戰인 三屯子戰鬪이다. 鳳梧洞은 4면이 야산으로 둘러 싸여 마치 삿갓을 뒤집어 놓은 것과 같은 지형의 천연 요새지였고, 입구에서 25里에 걸쳐 하동, 중동, 상동 마을이 30~60호씩 몰려 살던 곳다. 日帝는 三屯子戰鬪 ..

義兵抗爭史 2020.05.04

■ 45. 獨立軍 統合

義兵抗爭史 ■ 45. 獨立軍 統合 1920년 봄이 되자 [洪範圖]의 대한독립군은 대규모 국내 진입 계획을 수립하고 군사력 집중을 위해 분산된 독립군단의 통합작업에 착수, 1차적으로 [大韓國民會의 國民軍]과 [大韓獨立軍]을 통합했다. 이어서 3.1 운동 이후 [安武]가 지휘하는 간도지방에서 가장 세력이 강한 [大韓國民會의 國民軍]을 [大韓獨立軍]과 통합하였다. ☞ 통합된 군단의 행정과 재정은 국민회가 관장하며, ☞ 軍務는 [大韓獨立軍]을 [洪範圖]가, ☞ [國民軍]을 [安武]가 담당, 지휘하도록 하고, ☞ 軍事作戰을 전개할 때에는 [洪範圖]가 2개 군단을 [征日第一軍司令官]이라는 이름으로 통수케 하였다. 이어 [征日第一軍]은 [崔振東]이 이끄는 [軍務都督府]와도 통합시켰다. 결국 [洪範圖]의 독립군 통합 ..

義兵抗爭史 2020.05.04

■ 44. 獨立軍 創設

義兵抗爭史 ■ 44. 獨立軍 創設 나라가 없어지던 날 1910년 8월 29일, 帝國主義 日本은 景福宮에 일장기를 걸어 놓고 국권 찬탈을 철저히 상징했다 이토록 뼈아픈 민족의 苦難史를 막기 위해 자신과 가족을 버리며 오직 쓸어져 가는 大韓帝國을 위해 몸 바친 그 이름을 義兵이라 불렀고 실로 자랑스럽고 존경스러운 이름이다. 이들 의병을 [乙巳勒約]에 의거 [韓日合邦]된 시점을 기준으로 大韓帝國이 멸망하기 이전까지 일제 침략에 항전한 것을 [義兵戰爭], 大韓帝國이 멸망한 후에 일제와 싸운 것을 [獨立戰爭]으로 구분한다. 국권 상실을 전후해 간도와 연해주 지방으로 옮겨온 의병 출신의 애국지사와 교민들은 각기 독립운동단체를 결성하고 독립군 기지를 설치하여 장차 독립전쟁에 대비한 독립군을 양성하고 있었다. 국내에서..

義兵抗爭史 2020.05.03

■ 37. [李康秊년]의 百潭寺戰鬪

義兵抗爭史 ■ 37. [李康秊년]의 百潭寺戰鬪 [李康秊]은 문경시 가은읍 상괴리 출신으로 1879년 무과에 급제했으나 일제 치하의 관직을 버리고 귀향, 1896년 1월, 문경에서 처음으로 의진을 결성, 충북 제천의 호좌의 진에 합류해 유격장으로 여러 전투에 참여하다가 동년 7월에 의병을 일단 해산하고 10년간 [유인석] 밑에서 儒學 공부에 전념하다가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고, 1907년 고종의 강제 퇴위와 군대 해산이 강행되자, [이강년]은 1907년 8월에 제천에서 다시 의병을 일으켰다. 하여, 강원. 충청. 경북 일대 八域同志에게 남긴 告訣文(이별을 고하는 글)에서 [싸움 30여 회에 죽여서 얻은 敵將의 머리만도 100여 개]라고 한 그대로 역전의 노장으로 그가 남긴 의병 투쟁사는 실로 ..

義兵抗爭史 2020.04.27

■ 36. 聯合義兵의 서울 進攻作戰

義兵抗爭史 ■ 36. 聯合義兵의 서울 進攻作戰 항일 의병 투쟁이 새로운 기세로 고조되는 가운데 의병장들에게 부과된 새로운 현실적 과제는 압도적인 왜군과 싸우기 위해서는 연합전선의 결성이었다. 국권회복을 궁극적 목표로 투쟁하고 있는 의병들로서는 서울 탈환의 꿈은 가슴에 사라지지 않는 하나의 커다란 이상이었다. 하여, [이인영] 의병장은 지방에서 제 아무리 日軍과 싸운다 해도 日軍이 서울을 장악하고 있는 한 국권회복은 불가능하다고 판단, 전국의 산발적인 의병진을 대규모 연합의병부대로 편성하여 통일된 지휘 아래 서울로 진격하여 일거에 일군을 패퇴시키려는 계획을 수립하였다. 1907년 11월 각 의병대장에게 경기도 양주로 집결할 것을 촉구하였고 이어 ‘13도 창의 대진 소원 수부’를 설치하고 의병장들의 만장일치..

義兵抗爭史 2020.04.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