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전체보기 1963

■ 35. 군 강제해산 이후의 의병항쟁 영향

義兵抗爭史 ■ 35. 군 강제해산 이후의 의병항쟁 영향 군대 해산을 계기로 의병 항쟁은 극적 전기를 마게 된다. ☞첫째, 항일 항전의 확대이다. 해산 전의 활약 지역이 경기-충청-전라-경상-강원 5道와 40餘郡이었던 것이 해산 후에는 전국 주요 도시의 진위대 해산병이 지방부대와 합류 또는 단독부대로 조직함으로써 의병진의 규모는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둘째, 의병진의 전술 향상과 무기의 확충이다. ☞셋째, 의병 대열의 변화와 대열 구성의 변화이다. 군대 해산 이전의 의병장은 대부분 고관 또는 유림 양반이었는데 군대 해산 이후에 표# 에서와 같이 군인이 의병장이 되어 지도적 역할을 하게 되었다. 표# 구분 장교 하사 병 포군 계 이원(명) 22 28 33 4 87 비율(%) 25.3% 32.2% 37.9%..

義兵抗爭史 2020.04.27

■ 34. 二次 地方 眞僞隊 解散과[閔肯鎬]義兵將

義兵抗爭史 ■ 34. 二次 地方 眞僞隊 解散과 [閔肯鎬]義兵將 日帝는 서울 시위대 해산에 이어 제2차로 지방 진위대 해산에 착수하게 된다. 서울의 시위대 해산 시 상황을 전해 들은 원주 진위대 병사들은 격분하여 무기고를 장악, 1천2백 정의 소총과 4만 발의 탄약을 확보하고 원주 의병과 합세하여 원주시를 장악하고 구국항쟁을 계속하였다. 대표적으로 강원도 원주진위대 소속 특무 장교(특무상사) 출신으로 강원도 의병을 이끈 [閔肯鎬] 의병장은 군대 해산에 반발하여 무장 탈영한 병사들 중심으로 편성된 義兵部隊는 뛰어난 전술로 100여 차례 전투에서 일본군을 괴롭혔지만 [심구장] 이라고 알려진 조선인 변절자의 밀고로 일군에 체포되었는데 의병들의 구출작전으로 도주하려다 사살당하고 만다. 그가 죽기 전 강원도 관찰사..

義兵抗爭史 2020.04.27

■33.8월1일 전투

義兵抗爭史 ■33. [8월 1일 전투] 군대 해산령을 위하여 일본은 한반도에 분산 주둔하고 있던 제 13사단 병력을 서울로 집결시키고 제12여단을 추가 파병하면서 군 해산 전까지 병력통제를 강화하였다. 7월31일 야간, 군부대신 [이병무]는 사전 포병전력을 일군에 넘기고 [순종]을 협박, 군대 해산 조칙 발표를 강요하고 이완용은 [이등방문]에게 군대 해산시 민심 동요 예방과 왕명을 위반하고 폭동시 진압할 것을 요청하였다. 8월 1일, 일제 한반도 주둔 사령관 [하세가와]가 대대장급 이상 장교 전원을 소집하여 장교들은 고용 보장한다고 하면서 [대한제국군 해산]령을 먼저 발표하고, 병들에게는 군대해산계획을 숨기고 [도수 훈련][공과금 지급] 명목으로 비무장으로 [훈련원]에 소집시키니 52.7%인 1,812명..

義兵抗爭史 2020.04.26

■32. 舊韓末 軍事力

■☞ 군 강제 해산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하여 [구한말 군사력]에 대하여 덧붙인다. 義兵抗爭史 ■32. 舊韓末 軍事力 [1] 대원군 쇄국정책을 펴던 시기만 해도 조선군은 강군이었다. *병인양요는 정족산성 전투에서 프랑스군과 싸워 격퇴. *신미양요는 미군에 일방적으로 밀리긴 했는데 조선군이 너무 악착같이 싸워 결국 미군은 한양 진격 포기. #대원군 실각하고 민비 외척이 득세하여 군 기강이 문란해지면서 개판 5분 전 됨. [2] 군사력 증강 *1897년 고종은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고치고 광무개혁을 시작, 군사력 비약적 향상됨. *군사학교 설립, 장교 양성, 국가예산의 30% 이상을 증액시켜 야포, 기관총 등 현대무기 도입하여 근대적 군대로 탈바꿈하였으나 동학농민군 학살에 사용되었고, *乙未事變 [閔妃弑害] ..

義兵抗爭史 2020.04.26

■ 31. 第三段階 丁未義兵

義兵抗爭史 ■ 31. 第三段階 丁未義兵 3단계의병은 1907년 7월, 국권회복을 위한 헤이그 밀사사건을 계기로 일제는 한국 식민지화를 위한 3가지 중요한 조치를 강구하게 되는데........... ☞첫째, 高宗을 강제 退位시키고 허약한 순종의 즉위시켰고, ☞둘째,정미7조약 체결을 강요, 통치권을 통감부로 하여금 장악케 하는 통치체제 강화와, ☞셋째, 8월 1일부터 대한제국군을 강제 해산 하는 등의 사태가 일어나자, 이에 국민적 저항으로 일어난 의병전쟁이 丁未義兵이다 3단계 정미의병은 해산군인이 의병전쟁에 참전함으로써 전술면에서 크게 발전하였고 국민전쟁으로 발전하게 되어 1907년 12월에 楊州에서 [허위]·[김규식]·[연기우] 등이 주도하는 연합의병 진영으로 13도창의대를 결성하여 이미 일본의 지배하에 ..

義兵抗爭史 2020.04.24

■ 30. [許蔿] 義兵將

義兵抗爭史 ■ 30. [許蔿] 義兵將 [許蔿] 선생은 1854 년 4월 1일 , 경북 선산의 대지주인 한학자 집안에서 출생 , 1895년 , 45세 때 을미사변 이 일어나고 [김홍집] 내각이 들어서며 단발령을 내리자 , 분개한 선생은 경북 김천에서 의병을 일으켜 장날을 기하여 [聖州]에 포진하여 관군과 전면전을 펼쳤으나 , 협공하는 관군을 막을 수 없어 [이은찬] , [조동호]가 전사하자 충북 진천 으로 陣을 옮길 때 고종황제로부터 의병 해산령이 내려져 자진 해산 하고 말았다. 1899 년 의 永禧殿 참봉, 성균관 박사 등에 임명되었다가 平理院 首班 判事 가 되었다. 1904 년 , 韓日議政書 강제 체결 사건으로 [이상천] , [박규병] 등과 격문을 살포하는 저항운동을 재개하였다. 1907 년 이 강제 ..

義兵抗爭史 2020.04.23

■ 29.[申乭石]의 東海岸 遊擊戰鬪

義兵抗爭史 ■ 29. [申乭石]의 東海岸 遊擊戰鬪 영남 방면 의병 중에서 가장 용감한 활동을 전개한 [申乭돌石]은 국운이 날로 기울고 일제 침략행위가 심하여짐을 보고 비분강개하여 乙未義兵 때부터 활약한 인물이다. 그는 을사조약이 전해지자 울분을 참지 못하고 1906년 4월, 그의 고향 寧海郡 福坪里에서 家産을 털어 의병을 모으니 그 수가 300명에 이르렀다. [申乭石] 義兵은 寧海邑으로 보무도 당당하게 들어가 무기 등 관군의 군수품을 접수하고 주민들을 안주시킨 다음 다시 동해안을 따라 平海邑을 차지하고 다시 병력을 증강하여 蔚珍邑에 들어가니 의병의 수가 3千名에 달하였고 [申乭石] 의병진의 명성은 크게 알려지게 되었다. 그해 11월경부터는 日月山-白岩山-大遯(둔)山-東大山 지역에서 활동하면서 진위대와 왜..

義兵抗爭史 2020.04.23

■ 28. [崔益鉉]義兵의 순창유진 ■

義兵抗爭史 ■ 28. [崔益鉉]義兵의 순창 유진 丙午義兵 중에서 군사적 행동은 미미하였지만 건국 의병 항쟁에 큰 영향을 미치고 항일 독립운동의 정신적 지표가 된 의병운동은 [崔益鉉]의 의병운동이다. 74세의 老學者인 그는 강직한 관리로 衛正斥邪運動을 전개하여 항상 抗日의 선봉에 섰기 때문에 강화조약 때 [5 불가론]의 상소로 전국 유생의 표상이 된 인물로 그의 행동은 곧 유림의 진로를 결정하는 좌표가 되었다. 3월 24일, [崔益鉉]은 前任實郡守 [임병찬]을 만나 동지 규 합을 시작하여 5월 23일, 泰仁 武城書院에서 門徒 80명을 모아 5 조약의 부당성을 강조하고, 6월 4일,향교에서 제사를 올리고 모여든 1,000여 명의 동지를 규합, 의병부대를 편성하였다. 그는 의병부대를 이끌고 全州로 向하려다가 ..

義兵抗爭史 2020.04.23

■ 27. [閔宗植]의 洪(州)城戰鬪

義兵抗爭史 ■ 27. [閔宗植]의 洪(州)城戰鬪 丙午義兵 中에서 가장 大規模 活動으로 日帝 軍警과 격전을 벌였던 義兵陣은 [閔宗植=사진]의 洪城義兵이었다. 洪城은 乙未義兵 때도 [김복한]. [이설] 等을 비롯한 전직 관리와 유생들이 중심이 되어 의병이 봉기 항쟁했던 곳이고, 1906년 3월 중순경에도 먼저 [林秉瓚]. [朴昌魯]. [蔡光默]등이 수천 명의 의병을 모아 홍성을 점거하려다 실패한 곳이다. 하여, 1906년 5월 11일, 참판을 역임한 바 있는 [閔宗植]은 [金光祐]. [趙羲洙]. [鄭在鎬]. [黃英秀] 等과 홍산에 모여 擧義할 것을 결의하고 舒川에 다다르니 의병수가 1천여명에 이르고, 板橋 - 藍浦 입성 때는 1만 군사로 증가했다. 의병진은 계속 행진하여 保寧을 지나 結城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義兵抗爭史 2020.04.22

■ 26.再起 義兵의 上疏와 蜂起

義兵抗爭史 ■ 26.再起 義兵의 上疏와 蜂起 丙午 義兵 中에서도 가장 먼저 再起한 地方은 [乙未義兵] 당시 [柳麟錫]을 중심으로 湖左義兵陣의 활동지였던 原州.堤川.丹陽을 중심으로 한 中部地方이었다. 乙巳條約이 있기 2개월 전인 1905년 2월 중순경, 義擧를 결정한 [元容八]은 많은 親知 志士 및 민중들의 호응을 얻어 1천여 명을 모집하여 훈련을 하면서 신망 있고 유능한 인물을 찾고 있었다. 이 같은 정보를 입수한 원주 진위대는 [一進會員]들을 시켜 와해 공작을 하는 한편 [元容八]을 追跡, 橫城에서 체포하니 의병진은 와해되고 만다. 왜군 : [풀어주면 다시는 군사를 일으키지 않겠느냐?] [元容八]:[동대문 밖에 나가면 다시 군사를 일으키겠다] 왜군 :[누구와 함께 군사를 일으키겠느냐?] [元容八] :[..

義兵抗爭史 2020.04.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