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淸軍 攻勢擊退 ▣淸軍 攻勢擊退 ■한편, 1637년 1월 23일 자정 무렵, 남한산성에서는 조선이 척화신들을 묶어 보내겠다고 약속했음에도 남한산성에 대한 공격을 실시하는 것은 인조의 출성을 이끌어내기 위한 의도가 짙게 베어 있었다. ■청군은 양동작전을 펼쳤다. 먼저 서문 방향에서 성을 공격하는데 .. 丙子胡亂 2016.09.09
▣江華城 慘狀 ▣江華城 慘狀 ■청군에 의한 살육과 자살이 속출하는 와중에 왕세손이 탈출에 성공한 것은 그나마 다행이었다. 왕세손은 인조의 손자이자 소현세자와 강빈의 아들이었다. 청군이 강화성으로 밀려들 때 강빈은 상민의 옷을 갈아입고 동생 姜文星과 金仁, 徐後行 등 다섯 명의 내관에게 .. 丙子胡亂 2016.09.09
▣阿鼻叫喚의 江華島 ▣阿鼻叫喚의 江華島 ■南門에 머물던 김상용은 화약궤짝에 불을 질러 스스로 폭사했고, 우승지 洪命亨,도정 沈俔,봉산시정 李時稷,주부 宋時榮,前공조판서 李尙吉 등이 "오랑캐에게 무릎을 꿇을 수 없다"면서 자결했다. 悲劇의 손길은 먼저 여자들과 아이들에게로 뻗쳐왔다. 여자들은 .. 丙子胡亂 2016.09.09
▣江華島 陷落 ▣江華島 陷落 ■이렇게 갑곶이 무너지자 싸울 의지도 능력도 없던 김경징 등은 당황하여 해안의 병력을 이끌고 강화성 안으로 달아나려고 했다. 호조좌랑 任善伯이 봉림대군에게 달려가 호소했다. "어찌 천연의 요새를 버리고 허물어진 성안에 들어간단 말입니까? 나라의 존망이 이 한 .. 丙子胡亂 2016.09.09
▣무너지는 江華城 ▣무너지는 江華城 ■1637년 1월 21일, 通津假守 [金迪]으로부터 청군이 강화도를 향해 배를 운반하고 있다는 보고를 하자 검찰사 김경징은 강물이 언 상태에서 배를 운반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면서 김적의 목을 베려고 했다. 김경징은 청군이 動車를 이용하여 배를 육로로 운반하리라고.. 丙子胡亂 2016.09.09
▣江華島 攻`防態勢 ▣江華島 攻`防態勢 ■1637년 1월 19일, 청군은 벌봉과 한봉 일대에 홍이포를 설치하고 남한산성을 향하여 포를 쏘며 인조의 출성을 요구하는 무력시위를 하여 희생자가 발생하였고 산성은 공포 속에 빠져들었다. 이날 강화도를 공격하기 위하여 [도르곤],[호게],[공유덕] 등 淸軍 指揮部가 .. 丙子胡亂 2016.09.08
▣淸, 國書拒否 ▣淸, 國書拒否 ■1637년 1월 18일, 논란 끝에 최명길이 홍타이지에게 보낼 국서 초안을 작성하고 비변사 신료들이 돌려보며 수정했다. "소방은 10년 동안 형제의 나라로 있으면서 오히려 대국의 운세가 일어나는 초기에 죄를 얻었으니, 후회해도 소용없는 결과가 되고 말았습니다. 지금 원.. 丙子胡亂 2016.09.04
▣選擇의 岐路에 서다 ▣選擇의 岐路에 서다 ■ 1637년 1월 12일, 앞서 보낸 국서에 대한 회답이 없자 이를 타개하려고 최명길이 국서를 들고 또 청군 진영으로 갔다. 국서의 내용도 명과 관련된 내용을 언급하면서 공손하게 썼다. "소방은 바다 구석에 위치하여 오직 詩書만 일삼았지 전쟁은 몰랐습니다. 약국이 .. 丙子胡亂 2016.09.04
▣包圍部隊 增强配置 ▣包圍部隊 增强配置 ■청 측의 회답을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던 1637년 1월 7일, 강원도 관찰사 조정호 휘하의 군병이 龍津에 머물며 대오를 수습하고 있고, 함경도 관찰사 민성휘가 함경도의 병력이 김화에 도착하여 산성을 구원할 채비를 하고 있다는 장계가 날아들었다. ■1월 7일에는 .. 丙子胡亂 2016.09.04
▣詔諭 答書 ▣詔諭 答書 ■논란 끝에 홍타이지에게 보내는 답서를 완성했다. 답서의 맨 앞에 "조선국왕은 삼가 대청국 관온인성황제께 올립니다"라는 표현을 쓰고 과거의 잘못을 사과하는 내용으로 채웠다. "소방이 대국에 잘못을 저질러 스스로 兵禍를 불렀습니다. 특사를 보내 정성을 드리려 했으.. 丙子胡亂 2016.09.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