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三學士 ▣三學士 ■ 청군이 철수할 때, 홍익한은 평양서윤으로 있었다. ■1637년 2월 12일, 조정은 증산현령 邊大中에게 심양으로 압송토록 하였다. 용골대 : "너의 나라 신료들 가운데 척화를 주장하는 자가 퍽 많은데, 어찌 유독 너만 끌려왔는가?" 홍익한 : "작년 봄에 네가 우리나라에 왔을 때 訴.. 丙子胡亂 2016.09.11
▣소현세자 ▣소현세자 ■1637년 2월 8일, 소현세자 일행이 떠나던 날,인조는 昌陵근처까지 거동했고, 인조가 소현세자를 만났을 때 백관들의 통곡소리가 이어졌다. 인조는 세자 일행을 데려가는 도르곤에게 깍듯이 예의를 갖추었다.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자식이 이제 떠나니, 대왕께서 가르쳐 주시.. 丙子胡亂 2016.09.10
▣홍타이지 撤軍 ▣홍타이지 撤軍 ■1637년 2월 2일, 홍타이지가 철수길에 올랐다. 도르곤에게 무엇보다 피로인을 차질없이 심양까지 끌고오라고 강조하면서 조선에서의 나머지 일들은 부하들에게 맡기고 먼저 출발한 것이다. 인조는 치욕을 삼키며 홍타이지의 배웅길에서 다시 한 번 三拜九叩頭禮를 행.. 丙子胡亂 2016.09.10
▣戰禍 ▣戰禍 ■ 인조의 삼배구고두례로 상징되는 치욕적인 항복과 함께 전쟁은 끝났다. 하지만 귀천을 막론하고 조선 사람들의 참혹한 고통은 이제 막 시작되고 있었다. 볼모로 끌려가는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화친을 방해하여 전쟁을 불러왔다는 죄목으로 연행되는 삼학사, 경향 각지에서 .. 丙子胡亂 2016.09.10
▣길고 처참했던 하루 ▣길고 처참했던 하루 ■홍타이지가 申時(오후3~5시)무렵, 자리를 뜬 뒤에도 인조는 밭 가운데 앉아 그들의 지시를 기다렸다. 해질무렵에야 도성으로 돌아가도 좋다는 통고가 내려져 인조는 인질이 되어 심양으로 가게 될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부부와 이별한 채 귀경길에 올랐다. 송파나.. 丙子胡亂 2016.09.09
▣三拜九叩頭禮 ▣三拜九叩頭禮 ■1637년 1월 30일, 인조가 50여 명의 수행원을 이끌고 서문을 나와 산성밖 5리쯤 왔을 때 용골대가 영접을 나왔다. 용골대 일행이 앞장서고 인조는 삼정승과 판서,승지와 사관만을 거느리고 삼전도를 향해 걸어서 나아갔다. 군사를 도열시켜놓고 장막에서 기다리던 홍타이.. 丙子胡亂 2016.09.09
▣受降節次 通告 ▣受降節次 通告 ■국가를 다시 일으켜 준 은혜란 "조선이 명나라에 대해 그토록 고마워했던 [再朝之恩]에 다름 아니었다. 이날 저녁, 인조는 임금으로서 신하를 붙잡아 적진에 보내고 적의 처분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참담함 때문에 울고 또 울었다. 이날 전체적인 대강이 확정되었고 용.. 丙子胡亂 2016.09.09
▣홍타이지의 詔諭文 ▣홍타이지의 詔諭文 ■1637년 1월 28일, 용골대가 홍타이지의 조유문을 가지고 왔다. "그대는 짐이 식언할까 의심하지 말라. 지난날 그대의 죄를 모두 용서하고 규례를 상세하게 정하여 군신관계를 대대로 이어가고자 한다"는 내용으로 시작하여 향후 조선이 준수해야할 조건들을 다음과 .. 丙子胡亂 2016.09.09
▣仁祖,出城決心 ▣仁祖,出城決心 ■용골대(사진)는 "국왕이 직접 나오지 않는 한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며 충격적인 내용을 통고했다. 강화도에서 데려온 종질 珍原君과 내관 羅業을 보여주면서 강화도 함락을 알려주었다. 강화도 함락 소식에 남한산성은 충격에 빠졌고 분위기는 한순간에 바뀌었다. .. 丙子胡亂 2016.09.09
▣仁祖의 出城强要 ▣仁祖의 出城强要 ■1637년 1월 25일, 청군의 요구에 따라 이덕형(사진), 최명길 등이 청 진영으로 가자 용골대와 마부대가 "황제가 내일 귀국하실 것이니 국왕이 출성하지 않는다면 사신은 다시 오지말라"며 그동안 받았던 국서를 모두 돌려주었다. 사실상의 최후통첩이었다. 최명길 등이.. 丙子胡亂 2016.09.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