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 ■ 소하 와 조참 (76) ■ 소하 와 조참 효혜제 2年 상국 소하의 病이 깊어져 皇帝가 直接 소하를 찾아간다. 百年 뒤에라도 만약 상국이 죽는다면 누가 상국의 자리를 이을 만하겠소? 소하와 조참은 고을의 아전바치로서 아직 미천할 때는 사이가 좋았으나, 소하는 承相이 되고 조참은 將軍이 되면서 틈이 벌어.. 司馬遷의 史記 2010.02.18
75. ■ 季 布 (75) ■ 季 布 漢나라가 天下를 갓 平靜하였던 當時 슬피 우는 울음소리가 그치지 않고 부상당한 이도 아직 몸을 추스러지 못한지라 조야가 休息을 취하고 싶어하던 때였다. 北方 흉노의 선우인 묵돌(冒頓)은 한때 대단히 强盛하여 활 쏘는 兵士 30 萬을 자랑하고 있었다. 묵돌은 본래 漢나라를.. 司馬遷의 史記 2010.02.17
74. ■ 東陵侯 "召平" (74) ■ 東陵侯 "召平" 秦나라 때 동능후를 지낸 적이 있는 召平이란 사람이 있었다. "召平"은 秦나라가 망하자 벼슬을 잃은 데다 집이 가난하여 장안성 동쪽에서 오이 農事를 짓고 살았다. 그런 그가 農事를 짓는 데도 남다른 재주가 있어 그가 기른 오이는 맛이 매우 좋아 사람들은 그의 옛 封.. 司馬遷의 史記 2010.02.17
73. ■ 韓信에 대한 死後評 (73) ■ 韓信에 대한 死後評 이렇게 죽은 韓信의 죽음을 두고 태사공 司馬遷은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世上 사람들은 간혹 韓信을 두고 이렇게 말한다. 韓信은 남보다 앞서 큰 計策을 세우고 高祖와 함께 漢中에서 일어나 三秦을 평정하였다. 이윽고 병력을 나누어 北으로 魏나라를 무찌르.. 司馬遷의 史記 2010.02.17
72.■ 괴 철 (72) ■ 괴 철 韓信은 "괴철의 말을 안 들은 것이 한스럽다."는 탄식을 남기고 미양궁 종실 아래에서 呂后에 의해 참살당한 사실을 뒤늦게 알게된 韓信의 모사 "괴철(문통)"은 두 다리를 뻗고 대성통곡했다. 그 때 中大夫 "육가"라는 사람이 皇帝의 勅命을 받고 "괴철"을 체포하러 왔다. 皇帝는 .. 司馬遷의 史記 2010.02.17
71. ■ 韓 信 의 最 後 (71) ■ 韓 信 의 最 後 呂太后는소하의 計策에 따라 漢高祖 劉邦이 모반을 일으킨 "진희"를 잡아 죽이고 君臣들이 모두 宮中에 모여 祝賀宴을 하게 되었다는 것을 거짓으로 꾸며 韓信도 參席하라고 일렀다. 呂太后는 祝賀宴에 參席하기 위해 들어오는 韓信은 곧장 포박하고 심문한다. 韓信이 .. 司馬遷의 史記 2010.02.17
70.■ 韓 信 의 最 後 (70) ■ 韓 信 의 最 後 그러나 劉邦은 "韓信"을 포박하여 낙양으로 끌고와 問罪하기를 "韓信은 조칙을 어기고 齊나라를 공격함으로써 "역이기"를 참살 당하게 하고 짐이 성고땅에 포위 당하고 있을 때 救援을 오라 하였건만 너는 앉아서 승부만 구경하고 있지 않았느냐?" "그리고 근자에 와서.. 司馬遷의 史記 2010.02.17
69.■ 韓 信 의 最 後 (69) ■ 韓 信 의 最 後 소하는 韓信의 才能을 알아보고 劉邦에게 천거하여 大將軍이 되어 趙나라를 정벌하고 이어 齊나라 정벌하기 위하여 進擊中에 있는데 劉邦의 謀士 "역이기"가 이미 齊나라의 항복을 받아 내었으니 韓信은 軍隊를 철수할 것을 傳하였다. 이에 韓信의 謀士 괴철이 말했다... 司馬遷의 史記 2010.02.17
68.■ 季布 와 大俠 "朱家"(68) ■ 季布 와 大俠 "朱家" 司馬遷은 마음속으로 오랫동안 흠모해 온 季布를 두고 史記에 이렇게 썼다. 項羽의 기개도 덮을 수 없을 만큼 季布는 勇孟함으로 楚나라에서 이름을 떨쳤다. 그는 여러 차례 敵軍을 무찌르고 敵旗를 탈취하였으니 가히 將帥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가 형벌을 받.. 司馬遷의 史記 2010.02.17
67.■ 季布 와 大俠 "朱家" (67) ■ 季布 와 大俠 "朱家" 그런 일이 있은 후 어느날, 騰公 "하후영"이 劉邦에게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하후영: 폐하께서는 지금 千金을 내걸고 季布를 뒤쫓게 하고 계십니다. 그를 잡아들여 어찌하시려는 것입니까? 劉邦 :그걸 몰라서 묻는가? 지난날 季布는 項羽의 한 팔이 되어 여러 싸.. 司馬遷의 史記 2010.02.17